행복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 과정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자신이 한 행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다. 인간은 이러한 능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었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했다. 즉 인간은 자기가 살아갈 세상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왜인지도 모르지만 결정부터 하고 나서 의미를 찾는다. 이런 면 때문에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뇌활동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사실은 이미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도 사람들이 왜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부여한 의미를 위해서라면 생존과 번식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행동도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거나 자존심 때문에 돈도 안 되는 일에 집착하는 일 등이다.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위와 같은 행동을 하는 개체들은 후대에 유전자를 전할 확률이 낮지만 인간 사회에는 끊임없이 저런 개체들이 나타난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혹시 그런 행동들이 종(種) 전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그런 행동들 중에는 고층빌딩에서 사진 찍다가 추락사하는 경우처럼 개인과 종의 생존 모두를 저해하는 것들도 있다.
또라이들이나 할 짓이고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일들까지 저지른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학적 인간관을 가진 과학자들이 간과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인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첫째, 인간의 지각 기능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마음을 만들어내고 경험하는데, 인간에게는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의식 수준에서 모두 처리할 능력이 없다. 예를 들어, 오늘 타고 온 지하철에 붙어 있는 광고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영역인 의식(consciousness)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작동한다. 내가 의식할 수 있는 정보들은 나와 관련있는 것들 뿐이다. 즉 사람들은 관심이 없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 경험의 이러한 특성을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의 의식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참조가 되어주지도 않는다.
기억을 꺼내고 이야기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역할이다. 경험을 평가할 때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의 지속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정점-결말 법칙’을 채택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정점과 마지막 순간만 기억해 둘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 평가가 그 경험에 부여한 행위자의 의미가 된다.
이는 우리가 이동시간의 괴로움과 비싼 물가와 불친절을 감수하고 휴가를 떠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은 가장 좋았던 순간 또는 가장 나빴던 순간이지 가장 흔한 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바탕으로 다음에 그 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세상을 보다 명확하게 지각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경험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지각 능력의 한계와 더불어 개인의 지적 능력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자신이 사는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나름의 이론과 신념체계를 발달시켰다. 사람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악마와 저주를 창조했다.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요즘도 4시 44분에 시계를 보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믿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의미를 부여하여 통제력을 갖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믿음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대로 보고 듣고 느끼며 행동한다. 빅터 프랭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의미를 찾는 능력은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이미 일어난 일의 이유를 찾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를 상상한다. 삶에 대한 통제감은 안정감을 주며, 미래에 대한 즐거운 상상은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오늘의 행복을 되새기는데 도움이 된다.
의미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가상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은 그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도피이며 자기분열이다.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발견하는 삶의 의미는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표지 사진은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의 장례식 상상화입니다(사진출처: 역사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