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대한 생각의 차이
스모는 일본, 씨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스포츠입니다. 두 사람이 붙잡고 힘을 겨루는 스포츠는 역사적으로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는데요. 성경에도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했다는 대목이 나오고, 고대 올림픽에서 행해지던 레슬링, 러시아의 삼보, 몽고의 부흐, 터키의 카라쿠지크 등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기방법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데요.
문화는 문화 구성원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일종의 투사체계(projective system)입니다. 예를 들면 한 문화에서 널리 읽히는 이야기라던가, 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라던가, 사람들이 즐기는 놀이 등에는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충족해왔던 욕구들이 숨어 있습니다.
두 나라의 대표적 전통인 스모와 씨름의 경우도 마찬가지일텐데요. 이번 글에서는 스모와 씨름에 반영된 한국과 일본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씨름은 지름 8m의 원형 경기장에서 두 사람이 샅바나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의 스포츠입니다.
상대편을 지름 4.55m의 원형 경기장(도효) 밖으로 밀어내거나 발을 제외한 신체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인 스모와 대체적으로 비슷한 운동이라 볼 수 있는데요.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승부 결정 방식입니다. 상대의 발을 제외한 신체 일부분을 땅에 닿게 하면 된다는 것은 씨름과 스모가 비슷하지만 스모에는 상대방을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면 승리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인지 스모는 경기장 규격도 작고 모래도 얕게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기 좋게 마찰을 줄인 듯합니다. 실제 스모 경기를 보면 밀리는 리키시(선수)의 발이 모래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주르륵 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씨름의 경우는 경기장 규격도 8m로 크고 모래의 깊이도 30cm 이상 깔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큰 경기장에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 멋진 기술로 상대를 넘길 때 흩뿌려지는 모래 역시 씨름의 매력 중 하나죠.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씨름보다 스모의 규칙입니다. 일본인들은 왜 상대를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일본인들의 경계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안과 밖의 구분을 명확히 해 왔습니다. 오모테(表)/우라(裏), 소토(外)/우치(內)가 그것입니다.
물론 한국도 내집단과 외집단을 꽤 구분하는 편이죠. ‘우리’와 ‘남’이 한국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안팎(표리)은 우리와는 질적으로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인들은 평소에 우리와 남을 상당히 나눕니다만 생판 남들과도 쉽게 우리가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만 맞으면 말이죠.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있어 안과 밖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안팎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일본인들의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입니다.
일본인들의 안과 밖에 대한 관념을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일본에는 입춘 전 날(節分, 세츠분) 밤, 아버지가 오니(일본 도깨비) 탈을 쓰고 대문으로 들어오면 아이들이 콩을 던지면서 “오니(도깨비)와 소또, 후쿠(복)와 우치”라고 외치는 풍습이 있는데요. 도깨비는 밖으로, 복은 안으로.. 라는 뜻입니다.
즉, 밖은 나쁜 것들이 있는(있어야 할) 곳이고 안은 좋은 것들이 있는(있어야 할) 곳입니다. 스모에서 경기장(도효) 안은 우라/우치를 상징합니다. 내가 아닌 것(나쁜 것)을 나의 경계 밖으로 내모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차이점은 씨름은 3판 양승, 스모는 단판으로 승패가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모든 전통놀이는 기본적으로 삼세판입니다. 가위바위보에서 씨름까지 예외없이 적용되는 규칙이죠.
한국인들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인들은 높은 자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가치감이 높다고도 하죠.
Higgins의 자기불일치self discrepancy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객관적 현실에 근거한 현실적 자기(actual self)와 자신이 도달했으면 하는 이상적 상태를 뜻하는 이상적 자기(ideal self),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와 관계된 의무적 자기(ought self)를 갖습니다.
서양인들의 자기self는 그 개념부터가 제3자적 관점에서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self는 곧 현실적 자기actual self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강한 자기고양 경향과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자기현시적인 행위양식 등을 고려해보면 한국인들은 현실적 자기보다는 이상적 자기에 가까운 자기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자신의 객관적인 상황보다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로 인식하는 것이죠. 즉, 한국인들의 자기인식은 ‘실제의 자기가치보다 높은’ 자기가치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치감이 높다는 것은 시쳇말로 ‘근자감’, 즉 ‘근거없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는 자기인식인데 이러한 자기인식의 방식이 한국문화에 유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들은 한번의 승부로 패배를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세 판에 두 번은 져야 “이번엔 내가 졌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고보자!”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나 일본인들은 다릅니다. 한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리는 칼의 문화여서 그랬을까요. 한번의 승부로 승패가 갈리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승자로서의 상대와 패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일본에서 패배에 승복하고 승자의 부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또한 무사로서 명예로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익숙한 이러한 싸움의 방식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고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있는데요.
성을 함락시키고 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죽어나가도 조선인들은 항복은커녕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일제강점기 때도 드러났습니다. 왕실의 맥이 끊기고 나라가 사라졌지만 조선인들은 임시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여 끝까지 일본에 대항했지요.
마지막으로 주로 백성들에 의해 행해졌고 사랑받았던 씨름과 달리 스모는 황실과 막부의 후원을 받으며 발전하였고, 그래서인지 경기 전 거행되는 의식이나 두 선수가 맞붙기 전에 취하는 절차 등이 상당히 복잡하고 양식화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스모는 이러한 양식화 덕분에 신비로운 또는 환상적인 동양의 전통 스포츠로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반해 씨름은 백성들에 의한 백성들의 문화였기에 시선을 끄는 복장이나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고 나이든 사람들이나 좋아하던 민속놀이라는 이미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기술적 전통과 문화적 고유성을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최근 매력적인 외모와 화려한 기술을 갖춘 젊은 선수들의 등장과 함께 씨름은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