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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May 12. 2021

불편함은 불행하다는 뜻인가?

행복에 대한 오해 시리즈 N편

행복은 매우 자주 긍정적 정서로 정의된다. 불편함은 긍정적 정서라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불편을 느끼는 것은 불행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그냥 넘겨버리기엔 찝찝하다. 찝찝함도 일종의 불편함인데 평소 이렇게 찝찝함을 많이 느끼는 나는 행복할 일이 잘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일상의 불편한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행복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부정적 감정이라고 무조건 부정하다보면 부정적 감정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술가는 불행한가? 널리 통용되는 행복의 정의에 따르면 그렇다. 불안, 초조, 우울, 좌절, 절망...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없다. 음악이 됐든 그림이 됐든 글이 됐든 무언가를 창작해 본 적이 있는가? 하다못해 학창시절의 사생대회라도 떠올려보자. 

일찌감치 휘갈겨놓고 놀러간 녀석들은 제외하고, 조금이나마 작품에 자신을 표현해보려 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의 그 초조함. 다 내는데 나만 못 낼 것 같은 불안감.


예술가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초조함이라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어떤 음악가는 작곡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서 곡을 구상하는 순간을 지옥불에 불타는 경험으로 묘사했다. 글을 쓰는 작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논문을 쓰는 학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직장인도 상황은 같다. 

창작활동 중인 작가들

자신을 쥐어짜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흔히 통용되는 행복의 개념으로는 대단히 불행한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일들을 하는가? 창작의 결과물을 보기 위해서? 지옥불 같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곡이 완성되는 순간 천국을 맛본다. 해방감과 성취감, 자부심이 뒤섞인 짜릿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연구들은 성취는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쾌감은 곧 사라지고 허무감이 찾아온다. 예술가들이 곧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이유는 또 다른 성취를 위해서일까?


창작의 욕구를 성취만을 위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창작의 욕구는 자기실현의 욕구에 해당한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자기실현의 욕구란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는 욕구다.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이들에게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욕구다. 이들은 존재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유혹하는 안정과 평온을 거부하고 어쩌면 고통의 연속일 수 있는 길을 선택한다. 

어감이 주는 아름다운 느낌과는 달리, 자기실현의 과정은 꽃길이 아니다. 피를 말리고 잠못 드는 밤이 계속되고 때로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기실현을 향해 가는 이들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란 직업은 자신이 발견한 자기의 모습이며 창작은 그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의 창작은 자기실현 이전에 존재의 증명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삶을 불행하다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학생, 학자(대학원생)의 불편함도 마찬가지다. 다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공부를 즐겁게 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고통은 모르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선택의 여지는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 했다. 


모르는 채로 있으면 편안한 상태로 머물게 된다. 행복이 긍정적 정서라면 무엇이든 모르는 채로 있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알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때부터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왜 하는가? 공부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부정적이 되어야 한다. 공부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다. 


학자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증명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학자는 불행한 상태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시민이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현대사회의 주체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실존)은 늘 즐겁기만 할 수 없다. 시민들은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럽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목도해야 하며 때로는 분열과 갈등과 직면해야 한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한다. 


터져나오는 분노는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며 어떻게보면 개개인의 주장이 막히지 않고 표출되고 있다는 나름 건강한 사회의 지표다. 이를 혐오와 분열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사고다. 문제가 있다면 드러나야 하고 문제가 해결되려면 분노의 표출과 갈등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쌓여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썩은 살을 도려내는 일은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당장 편하자고 쓰레기를 방치하고 곪아가는 상처를 방치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뻔하지 않은가. 귀찮고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쓰레기와 상처를 내버려두는 삶이 행복이 아닐 거라는 건 분명하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견뎌야 하는 불편함이란 존재한다. 행복이란 고통과 괴로움, 불편함 속에서 찾아내고 느끼는 것이지 고통과 괴로움, 불편함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다.

Bon Appe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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