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삶의 무게
<김씨 표류기>에서 또 한명의 주인공인 여자 김씨는 은둔형 외톨이다. 외모 때문에 상처를 받고 방에 틀어박힌 채 SNS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자신을 창조하여 살아간다. 그녀가 세상과 소통할 때는 밤에 망원경으로 창밖을 관찰할 때뿐이다. 우연히 밤섬의 남자 김씨를 관찰하게 된 여자 김씨는 그가 짜장면을 먹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밤섬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 준다.
그토록 갈망했던 짜장면을 마주하게 된 남자 김씨. 그러나 남자 김씨는 짜장면을 돌려보낸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얻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삶은 자신의 것이고 행복 또한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유럽에서 싹텄던 실존주의 철학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인류사를 이끄는 보편적 법칙에 희생되어왔던 개인들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존주의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주어진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좀더 나은 것들로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 존재다. 즉 자신이 주인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라는 개념도 이와 관계 있다.
심리학이 주가 되는 최근의 행복연구들은 철학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존주의 철학은 긍정심리학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모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철학은 우리가 삶의 방향성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행복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행복해지는 방법에 집착하다가 자칫 삶의 방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실존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삶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는 실존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실존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것 역시 실존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실존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로 인해 존재할 수 있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삶 역시 실존이라 말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실존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부과된다.
즉 실존이란 기왕 태어난 김에 죽지는 못하고 살아지니까 사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듯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고 때로는 극복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실존은 자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 존재함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의미가 이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신의 삶을 모습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절망할 자유도, 내가 사는 곳을 떠날 자유도, 나와 연결된 이들을 귀찮아 할 자유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자유도, 심지어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할 자유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은 자유로 단죄받았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존재하게 된다.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그는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한 것으로서 어느 쪽이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 존재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 실천 방법은 살아갈 이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 의미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위의 조건들만 충족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실존을 삶을 대하는 수동적 태도가 아닌 능동적 태도로 정의하자면, 행복은 분명 능동적 태도와 관련이 높다.
행복연구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좋은 환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가치있는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더욱 행복해진다. 여기서 ‘가치있는 활동’과 ‘목표’란 개개인이 찾은 삶의 의미다. 그러나 실존은 행복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것 역시 실존하는 개인의 몫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선택한 진짜 세상은 분명 실존의 길이었지만, 그 후 네오의 삶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남루한 옷에 형편없는 음식, 집도 직장도 잃고 밤낮없이 기계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어떤 긍정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겠는가. 결국 네오의 동료 사이퍼는 가짜 삶이어도 좋다며 눈앞의 스테이크 한 조각을 위해 실존을 포기하고 동료들을 배신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힘’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실존철학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니체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강하고 위대한 존재로 고양시키고 싶어하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일신의 안위만을 탐하는 인간을 ‘말세인(末世人)’이라 칭하고 내적으로 강하며 기품있는 생명력이 충만한 인간을 ‘초인(超人)’이라 했다. 초인은 외부의 상황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항상 그 상황의 주인으로 존재하면서 상황을 압도(통제)하는 자신의 힘을 느끼는 인간이다.
니체에게 있어 행복한 사람이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의 곤경을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반면 불행은 내적으로 빈곤하고 생명력이 쇠퇴한 상태를 뜻한다. 우울과 염세주의는 불행한 사람들의 주된 증상이며, 이들은 고난과 고통을 자신의 안락함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기고 좌절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는 힘은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실존의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낼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다운 삶을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 나인가를 의심하는 사람은 적다. 나다운 삶이 쉽지만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