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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n 13. 2021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일본 vs 일단 죽이고 보는 한국

부친살해 동기로 살펴본 두 나라의 근현대사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두 가지 사건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입니다. 먼저 산업혁명은 자연의 힘에 의존하던 인류가 인공적인 동력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인간과 자연 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인류의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고도화되었지만 환경오염과 파괴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진 것도 사실이죠.     


시민혁명은 시민들의 힘으로 하늘이 내린 핏줄로 정해지던 왕과 귀족의 권위를 뒤엎은 사건입니다. 인간과 인간 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바뀐 것이죠. 이제 시민들은 계약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사회에 필요한 권력들을 스스로 갖추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후자입니다. 산업혁명이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면, 시민혁명은 신이 일부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권위를 걷어냄으로써 개인과 개인들의 모임인 시민이 주체가 되는 시대를 연 것이죠. 이것이 근대의 시작에 대한 사회학, 정치학, 철학, 역사학 등에서의 설명입니다.     


심리학, 특히 정신역동이론에서는 이 과정을 부친살해의 모티프로 설명합니다. 부친살해는 세계 많은 지역의 신화와 전설, 동화와 민담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신화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리스 막장드라마 말이죠.     


물론 부친살해는 은유입니다. 아버지는 기존 사회의 질서와 권위를 뜻합니다. 즉,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과거의 질서와 권위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가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의미죠. 올림푸스 신들의 우두머리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자신의 세계를 연 것처럼 말입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또한 부친살해는 또한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정신역동이론가 라캉에 따르면 아이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주체로서의 삶에 한 걸음 다가갑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욕구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존재입니다. 이 아버지를 극복해야 아이는 자신의 눈과 의지로 세상을 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역동이론의 관점에서 근대란 아버지를 죽인 자식들이 새롭게 연 시대를 의미합니다. 신(자연)의 명령에 복종했던, 신이 부여한 권위에 복종했던 아버지는 이성(과학)과 자유의지를 내세운 자식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 근대에 대한 태도에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일본을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새 시대를 연 나라로 규정합니다.


일본은 한 번도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고 새 질서를 구축한 적이 없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 일본을 연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이었고 그들은 과거의 권위 위에서 새 시대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아버지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사회의 시스템이나 외형은 유럽을 본받았습니다만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옛 것 그대로였달까요.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미군정에 의해 사회 개혁이 이루어질 때에도 천황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되었죠.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셈입니다.      


사실 일본은 예로부터 ‘멸사봉공(滅私奉公)’, 즉 사적인 것을 억누르고 공적인 것에 힘쓰라는 말에 대단히 익숙했던 사회입니다. 사회심리학자 미나미 히로시에 따르면 에도시대의 처세술로 ‘와레나시’라는 말이 있었다는데요. 직역하면 ‘내가 없다’는 얘깁니다. ‘제멋대로’하지 말고 오로지 윗사람에게 봉공하라는 뜻입니다.     


개인적, 사적인 것의 철저한 억압은 결국 자아의 부재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개인주의적이라고 묘사합니다만, 미나미 히로시는 이러한 모습은 ‘복종의 가면을 쓰고 적당하게 사리사욕을 달성하기 위한’ 자아, 즉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자아 대신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자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신역동이론에 의하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시대를 움직여 갈 자식들의 동력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반성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등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오히려 피해자로서의 자신들의 모습만을 부각시키려는 행태는 일본이 주체로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고 객체로서 자신들이 ‘당한’ 일에만 민감한 경험방식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면 한국은 어떨까요?


과거 어느 시점까지의 한국은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 역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는’ 나라였죠. 문학박사 김영희에 따르면, 한국의 전설, 설화, 민담에는 부친살해가 아니라 ‘자식살해’라는 모티프가 나타납니다.      

흉년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거나(손순매아, 동자삼 등) 현재의 질서를 뒤엎을 영웅이 태어나면 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후환을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이는(아기장수 설화) 등입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생매장하던 손순은 나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세상을 바꿀 아기장수를 죽인 부모는 역적의 부모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식살해의 서사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자식의 요구에 대한 아버지들의 답은 순종과 헌신이었던 것이다. 효(孝)를 으뜸 가치로 쳤던 한국의 역사에서 부친살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패륜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국이 오랫동안 자식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유지해왔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다른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면서 기존의 모든 권위와 질서는 하루아침에 부정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손에 살해당한 셈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타인은 자식들의 존재 역시 부정했고 자식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었죠. 따라서 근대 이후 한국인의 무의식에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한 타자에 대한 부정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아버지가 나타나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를 죽이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진 광복 이후의 사상투쟁, 독재와 싸웠던 4.19, 5.18, 6월 항쟁, 가깝게는 2016년의 촛불까지, 한국의 현대사는 부당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물리치고 주체로 서기 위한 자식들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6월항쟁 (사진출처: 서해신문)

꼭 정치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닙니다.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제사 갈등, 권위적인 직장문화를 둘러싼 꼰대 논쟁, 전통적 성역할에서 비롯된 남녀 갈등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서 전통과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습니다.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일본과 계속해서 아버지를 죽여온 한국. 말이 주는 느낌이 조금 그렇긴 하군요.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이 정신역동이론의 은유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과 죽이지 못한 것의 차이는 변화에 대한 태도로 이어집니다.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죽이고 새 질서를 구축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한국만큼 변화가 빠른 나라가 없죠. 그 결과, 한국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급변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워낙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다보니 그만큼 해결해야 문제도 많다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숙제긴 하지만요. 밖에서 보면 혼란스러워 보이고 안에서 봐도 속 시끄럽지만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해 나갈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죠.     


반면,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자식들(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강하고 잘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에 의존해버릇한 자식은 자신의 앞날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동력을 찾기 힘든 법이죠.      


이들은 스스로를 바꾸어야 할 갈등이나 문제를 만나면 아버지의 등 뒤에 숨거나 자신의 내적 세계로 침잠하려 합니다. 사회에 문제가 있어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뽑은 정치가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태도는 주체로서의 자기인식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등 자신들의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기에)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일본의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한 일본인들의 자아상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주체란 스스로 판단하여 실행하고 그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니까요.     


물론, 모든 문화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고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 일본의 문화 역시 누군가 함부로 평가할 부분은 아니겠으나, 현재 일본의 모습은 일본에서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하는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도, 일본과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도 썩 바람직한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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