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 vs 환상
방어기제는 욕구의 좌절로 인한 불안에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기제입니다. 문화는 욕구 충족의 체계입니다. 자연히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처리하거나 대응하는 체계도 나타나겠지요.
제가 문화와 방어기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박영숙의 연구 ‘속담으로 본 한국인의 방어기제’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빌헬름 분트가 <민족심리학>에서 주장하듯이 속담에는 신화나 전설, 동화와 같이 해당 민족의 무의식적 욕구와 이에 대한 해결방법 및 자아방어방식이 제시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연구자는 8,000개의 속담 중, 내용이 방어기제와 관련된 속담 800개를 일차적으로 추출하여 심리학자 2인과 정신과전문의 4인의 평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587개의 속담을 분석하였고, 이를 빈도에 따라 10가지 방어기제, 총 531개의 속담으로 정리했습니다.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인 1위에서 5위까지만 살펴보면, 반동형성(183/34.6%), 동일시(67/12.6%), 수동-공격(63/11.8), 투사(47/7.7%), 전치(32/6.0%)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인 반동형성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 ‘냉수먹고 갈비트림 한다’, ‘가난할수록 기와집 짓는다’ 등 자신의 현재 상태와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잘난 척이나 허세에 해당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허세는 개인이 느끼고 있는 열등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메꾸기 위한 보상적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허세 속담들은 지나친 자기과시나 외양 중시, 실속 없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상태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보아 ‘반동형성’이라는 방어기제로 분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 반동형성에 해당하는 속담들은 현재의 자신을 자신보다 부유하고 우월한 어떤 대상에게 동일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속담 중 두 번째로 많은 12.6%에 해당하는 동일시는 우월한 대상(부모, 성공한 사람 등)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욕구의 좌절이나 애정의 상실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는 방어기제입니다.
연구자는 ‘친구 따라 강남간다’, ‘남이 장 간다고 하니 거름지고 나선다’,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 ‘가재는 게 편이라’ 등의 속담을 동일시로 분류하였습니다만, 만약 ‘반동형성’으로 분류된 속담들도 포함한다면 무려 47.2%에 해당하는 속담이 동일시로 묶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어기제들은 현대 한국사회의 독특한 현상으로 꼽히는 과시성 소비나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특정 제품이나 업종의 유행 등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인들은 자기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자기애적 성격이 두드러지는데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강렬할 때 혹은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한국인들은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이들과의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집도 없는 이들이 종부세 걱정을 한다든가 본인은 최저임금도 못 받으면서 최저임금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이웃 간의 다툼으로부터 국제적 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원의 갈등에서 힘 있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 역시 동일시와 관계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입장도 정확히 이와 일치합니다.
정신역동 이론에 따르면 동일시는 자신에게 불안을 야기한 대상에 대한 공격적 정서를 줄여줌으로써 응집력있는 집단형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대상으로부터의 독립과 퇴행사이의 갈등을 완화시켜준다는 기능을 갖습니다.
이로 미루어 자기가치감이 높은 사람들이 관계의 유지가 우선시 되는 문화에서 살아오면서, 관계의 유지와 부정적 정서의 해소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방어기제로서 동일시의 역할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속담 연구에서는 따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원래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갖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로는 합리화(Rationalization)가 꼽힙니다. 합리화는 행동의 이유가 떳떳하지 못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합리화의 기능은 죄책감을 덜고 자기가치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를 왜곡해서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방어기제입니다.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의 주요 행동유형으로 꼽힌 핑계나, 매체를 통해 종종 들을 수 있는 특정 집단의 내로남불, ‘나 때는 말이야~’ 등의 언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소위 ‘꼰대’ 들의 무의식적 동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문화적 방어기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일본의 속담과 방어기제에 대한 연구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앞의 글에서 유추한 두 나라의 문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회피적 성격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할 것으로 추측되는 유형의 방어기제들을 꼽아봤습니다.
환상 또는 백일몽(Fantasy & Daydreaming). 이 종류의 방어기제는 현실 직면을 피하고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상 속에서는 괴롭고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고 현실의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무시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정감과 즐거움을 줍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의 문화콘텐츠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일본인이면 지켜야 하는 일본의 문화적 규범과 행위양식을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일본인들에게 무궁무진한 백일몽의 장이 되는 것이죠.
애니메이션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가 된 데에는 현실에서의 직접적인 갈등을 회피하려는 일본인들의 동기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우연히 보게 된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퇴직을 당한 한 노인은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지만 새로운 일자리 찾는 일은 힘들고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울해하던 노인은 지하철에서 깜빡 잠이 드는데 눈을 뜨니 열차는 낯선 곳에 와 있습니다.
역에서 나온 노인 앞에 애니메이션 ‘마루코는 아홉살’의 주인공 마루코가 만화의 그림체 그대로 나타납니다. 노인은 마루코를 따라가 마루코의 집에서 따뜻한 가족의 정이 담긴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노인의 손녀는 TV를 통해 그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만화 속 세상에 살고 싶다는 노인을 마루코는 ‘가족에게 돌아가라’며 돌려보내고 노인은 잠에서 깨는데요. 돌아온 집 앞에는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온 딸과 사위, 손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인에게 ‘이제 같이 살자’며 웃음 짓습니다. 가족은 그런 거니까요.
이 한편의 동화같은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갈등해결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얼굴 맞대고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상상 속 세계에서 아주 아름답게 갈등을 해결하려 합니다. 현실에서 이런 식의 결말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말이죠.
일본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없었다>나 같은 감독의 2018년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어느 가족>이 그려내고 있는 일본의 우울한 현실은 일본에서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어 불편하다는 것이죠.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트렌드는 ‘이세계물’입니다. 현실의 아주 평범한, 혹은 평균 이하의 주인공이 하루 아침에 다른 세계(이세계)로 가게 되는데, 그 세계에서 주인공은 왠지 모르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 닥치는 어떠한 문제도 쉽게 해결하면서 이세계의 영웅이 됩니다. 방어기제 백일몽의 학술적 정의가 바로 여기 있군요.
분리(Detachment)나 고립(Isolation) 등도 일본 문화와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방어기제 입니다. 분리는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으키는 느낌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 감정을 분리시키는 것이며, 고립(Isolation)은 긴장과 불안을 주는 상황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철수시키려는 방어기제입니다.
즉, 어떤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통스러운 감정을 분리하고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립시키는 방식의 행위양식입니다. 사회적 역할이나 친밀하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죠. 1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히키코모리들은 분리와 고립을 선택하여 백일몽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 유형이라 하겠습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위기에 닥쳤을 때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문화에서 학습되는 가치와 행동양식들이 특정한 유형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모든 한국인, 일본인들이 이런 병리적 행위양식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니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