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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Dec 27. 2021

칼의 나라 vs 종의 나라

한일 양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찌기 일본의 문화를 ‘국화와 칼’이라는 두 단어로 축약한 바 있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앞에서는 국화를 내밀지만 뒤로는 칼을 숨기고 있다’ 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물론 양면성은 일본문화의 중요한 특질입니다. 하지만 ‘국화와 칼’의 상징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상징과 같은 해석체계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 또한 대단히 우스운 일입니다. 과학자 자신들도 자신의 연구결과를 끊임없이 해석하는데 거기에는 본인의 주관과 관점, 지식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죠.     

문화 심리의 가장 기본적 토대가 되는 것은 해당 문화 사람들의 인식론, 즉 ‘앎’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인식론(epistemology)이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철학의 한 분야인데요.     


‘앎’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앎에 대한 인식으로 해당 문화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 즉 세계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에서는 사람에 대한 이해인 인간관이, 인간관에서는 나에 대한 생각인 자기관과 대인관계에 대한 생각, 그에 따른 행위양식들이 차례로 파생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결국 이 모든 것들과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앎에 대한 생각, 인식론이 마음 이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건데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일본인들의 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와카루(分かる)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눌 분(分)이 들어가 있지요. 일본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무언가를 ‘나누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참조: 일본어 '와카루'에 대한 짧은 생각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78)

이 외에도 일본어에는 칼 도(刀)나 칼 검(劍) 칼로 벤다는 뜻의 절(切)이나 참(斬) 자가 들어가는 표현이 대단히 많은데요. 몇 개만 예를 들면, 옆에서 돕는 것, 또는 조력자를 ‘스케다치(助太刀)’라 하는데 큰 칼(太刀)로 도와준다는 뜻이고, ‘우라기리(裏切り)’의 뜻은 배신으로 뒤에서 칼로 찌른다는 의미입니다.


딱 떨어지는 산뜻한 기분 또는 뛰어난 솜씨를 ‘기레아지(切味_베는 맛)’이라고 하거나 원고같은 것의 마감을 죄어서 자른다는 뜻의 ‘시메키리(締切り)’라고 하는 등 저는 일본어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엄청 많다고 합니다. 우리도 많이 쓰는 진검승부(眞劒-)같은 말도 일본 문화에서 온 표현이죠.     


이렇듯 일본인들은 칼로 찌르고 자르고 벰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고 세계를 구축합니다. 칼은 뭔가를 자르고 베고 나눔으로서 내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인식의 도구’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칼은 ‘강함’의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일본문화에서 강함이 갖는 의미를 여러 차례 말씀드렸는데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또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맨몸의 일본인들은 몇 가지 심리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일본 문화의 특성 때문에 일본인들은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 인생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 주어야 할 부모와의 관계나 유아기 경험에서 비롯되는 자존감,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들을 관리해야 할 능력 등에서 문제를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칼은 이러한 취약성을 극복하고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왜소하고 힘이 약해도 칼을 들면 얘기가 달라지죠. 칼 든 사람을 무시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부족한 자존감을 채워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다이죠부(大丈夫)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일본이 ‘칼의 문화’인 두 번째 이유입니다.      

나아가 칼을 든 사람은 무사, 즉 사무라이입니다. 사무라이는 명예를 중시하고 주군의 명령에 따르는 이들이죠. 매사에 전쟁에 나가는 무사의 마음으로 임하고 명예를 지키지 못했을 때 한없이 수치스러워하는, 그래서 수치스러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책임질 일을 회피하기까지 하는 일본인들의 행위양식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칼이 수행해 온 이러한 여러 측면의 기능 때문에, 오랜 역사 동안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사무라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은 일본문화를 가장 본질적으로 상징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도 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칼의 문화가 아니죠. 흔히 일본을 칼을 든 사무라이의 문화로, 한국을 붓을 든 선비의 문화로 요약하는데요. 사무라이와 선비는 두 나라의 지배계급이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주된 도구인 칼과 붓은 정확히 같은 비교차원의 대상인 만큼 이러한 비유도 상당 부분 타당합니다.      


칼을 든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조선의 선비들은 붓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정의했습니다. 때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붓으로 칼보다 더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죠. 펜(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겁니다.      


붓이 연필로, 연필이 볼펜으로, 볼펜이 키보드로 바뀐 현재, 선비들의 후예인 한국인들이 오늘도 키보드 배틀에 여념이 없는 걸 보면, 붓이 한국을 상징하는 것도 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상징물로 ‘종’을 들고 싶습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이어령 선생님도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일본인들이 쇠로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다면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멀리까지 가는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종은 불교의 사물(四物) 중 하나입니다. 좀 규모 있는 절에 가면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범종(梵鍾)을 다 볼 수 있는데요. 법고는 땅에 사는 네 발 짐승들을, 목어는 물에 사는 생물들을, 운판은 하늘에 사는 날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해 울리는 것들입니다. 


범종은 사물 중 으뜸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소리를 내는 것인데요. 특히 범종의 소리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까지 닿는다고 하죠.   

   

이 종은 불교가 전파된 나라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만 한국의 종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 크기나 주조 기술, 조형미 등 여타 문화의 종들과 비교하여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는데요.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소리입니다.     

가장 크고 가장 멀리 가는 한국 종소리의 비밀은 ‘맥놀이 현상’이라 하여 서로 다른 두 개의 주파수가 맞물리면서 발생하는 현상 때문인데요. 그 결과 종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마치 물결치듯 멀리까지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와 모든 것을 베는 일본의 칼과 세상에서 가장 멀리까지 가서 세상 모든 만물을 아우르는 한국의 종소리. 여기가 두 나라 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칼은 일본인들의 인식의 도구이자 자신을 완전하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저는 한국의 종도 칼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소리는 세상 만물을 아우르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우르다’는 말이 ‘알다’가 되었으리라는 것이 제 견해인데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내 인식의 범위 안으로 아우른다는 의미와 통하기 때문입니다.     

‘깨닫다’ 역시 ‘깨서 아우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존 인식의 틀을 깨고 새롭게 아울렀다는 것이죠. 사실 이런 추정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성격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 ‘아우른다’는 행위가 한국인의 심성에 매우 밀접하게 닿아있기 대문입니다.      


한국인들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플루언서’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한국인들은 누가 나를 무시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내 마음을 몰라주면 화병이 납니다. 현실의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차이가 날 때 굉장한 불편감을 느끼고 그 차이를 메꾸려고 무섭게 노력하기도 하지만, 안되겠다 싶으면 허세로라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장하죠. 특히 한국에 목소리 큰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과 크고 멀리까지 가는 소리를 내는 종. 따라서 종이야말로 모든 것을 자신의 세계 안에 아우르고 싶어하고 자신의 영향력이 주위에 널리 퍼지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상징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과연 언제부터 이런 사람들이었을까요? 최근의 학자들은 한국인들이 자기주장이 강하고 과시성 소비 등 자기현시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로 경제수준의 향상과 개인주의의 발달 등을 꼽고 있는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일단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든 시기가 최소 통일신라 시대구요. 이미 단군신화에 홍익인간(弘益人間_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우리가 이런 건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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