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쉬운 문화의 양면성
'냄비근성'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대개 고고한 지식인들께서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종종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어떠한 견해나 유행이 일시에 나타나서 사회의 주도적 풍조가 되었다가 또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러한 모습이 냄비가 확 끓어올랐다가 식는 것 같다고 붙은 이름입니다.
소위 '쏠림현상'이라고도 하죠. 일단 한국에 '쏠림현상'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죠. 그리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현대 한국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의 원인을 현대에서 찾으려 하지만 사실 그 기원은 꽤 과거로 거슬러 올라야 하는지 모릅니다.
20세기 초반의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에서 이러한 쏠림현상의 역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떡장사로 이득을 보았다 하면 온 동네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쪽집이 술 팔다가 손해를 보면 서쪽집의 할머니도 용수를 떼어들이며, 나아갈 때에 같이 와하다가 물러날 때에 같이 우르르하는 사회가 어느 나라의 사회냐.
(중략)
야소교(예수교)를 믿어야 한다 하면 삼두락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에 바치며 정치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수간 상점을 뜯어엎고 덤비나니, 이같이 맹종부화(附和)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하략) (신채호, 문제없는 논문, 동아일보 1924. 10. 13)"
신채호 선생이 말씀하신 이 현상은 현재도 여전합니다. 노래방 바람이 분 90년대 중 후반에는 한 집 걸러 노래방이 생겼고, IMF 이후 명예퇴직자들의 자영업 열풍이 불면서 두 집 걸러 통닭집이, 초고속 인터넷 망의 확산을 타고 세 집 걸러 PC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TV나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디션 프로가 유행하자 비슷한 컨셉의 프로들이 줄줄이 생겼고 어떤 영화가 흥행을 하면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이 스크린에 걸립니다. 몇년 전부터 열풍인 트롯 프로그램은 초반에 인기를 끈 <미스 트롯> 이후로 <미스터 트롯>, <미스 트롯의 맛>, <미스터 트롯의 맛>, <헬로 트로트>, <보이스 트롯>, <트로트 퀸>, <트롯 전국체전>, <트로트의 민족>, <나는 트로트 가수다>, <트로트가 간다> 등
한 채널 걸러 하나씩, 아니 한 채널에 몇개씩의 트롯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쏠림현상은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는데요. 한국인들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우르르 한 쪽으로 쏠렸다가 관심이 식으면 금방 또 다른 쪽으로 쏠린다는 것이죠.
동업종의 무분별한 창업으로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하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비판이나 끝모를 사교육 열풍, 특정 사회적 이슈에 순간적으로 달아올랐다가 다른 이슈가 터지면 곧 그쪽으로 방향을 옮기는 대중들에 대한 비판 등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냉소가 따릅니다.
하지만 모든 문화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문화 현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욕구가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구조와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 거기에 영향을 미치죠. 그것이 단일한 원인에 의해 나타나고 단일한 결과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은 심히 짧은 견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의 양면성에 대해서는 제 다른 글 '문화는 코끼리다'https://brunch.co.kr/@onestepculture/369 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맥락에서만 언급되어 온 쏠림현상의 긍정적 기능도 분명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쏠린다는 것은 곧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동반하죠. 외부에서 뭐가 바뀌든지 간에 반응이 없다면 쏠림현상 따위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은 지난 10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정도의 시간동안 경제체제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IT사회로 바뀌었으며, 봉건적 왕조 정치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자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되었죠.
한국과 같이 극심한 변화를 겪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100여년 동안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왔고 현재 한국이 이뤄낸 가시적인 성과들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쏠림문화야 말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요 동력입니다. 7,80년대의 경제개발 시기에 한국인들이 쏠리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요. IMF 위기 당시 전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단기간에 IMF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태안 앞바다에 유조선 사고가 났을 때 몰려들었던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을 냄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단재 선생이 사시던 시기의 국채보상운동 역시 맹종부화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까요.
빠른 공감은 엄청난 응집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냄비는 대단한 잠재력이고 가능성일 수 있습니다. 냄비는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지만 그만큼 빨리 이것저것을 해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해보다 안 되면 빨리 엎어버리고 다른 요리를 시작할 수도 있죠.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지적할 만큼 쏠림문화의 부작용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한국인들의 잠재력으로 이해되는 응집력과 쏠림문화는 종이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회에 역기능을 초래하는 쏠림현상은 유의해서 다룰 필요가 있지만 쏠림의 역기능만을 강조하여 그 이면의 순기능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죠.
그리고 사실 쏠림현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쏠림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대중을 쏠리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해답은 '냄비근성은 나쁘다'가 아니라 '냄비근성(?)은 언제 나타나는가?', 그리고 '냄비근성이 좋은 결과로, 또는 나쁜 결과로 이어지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등입니다.
한국인의 쏠림문화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내일이고 모레고 계속될 일이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