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다양성의 다른 말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1991년 소설 <쥬라기 공원>에는 유전자 기술을 통해 복원된 공룡들이 등장한다. 고등학생이었던 필자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공룡은 ‘벨로시랩터’였다.
실제 존재했던 벨로키랍토르와는 달리, 소설에서 그려진 벨로시랩터는 공포 그 자체였다. 뛰어난 지능, 강력한 근육과 발톱, 무엇보다 동료들과 협동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술로 야심차게 건설된 쥬라기공원을 끝장내는 빌런 중의 빌런이다.
벨로시랩터가 더욱 잔인해진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억 년 전 벨로시랩터는 당시의 생태계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로 현대에 갑자기 되살아난 벨로시랩터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약육강식의 본능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를 볼 때면 쥬라기 공원이 떠오른다. 한국은 (쥬라기 공원처럼)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그 위에 세워진 나라다. 35년의 일제강점기와 분단, 곧이은 내전, 수십 년간 이어진 군부독재는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상대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나라의 근간이었던 유교가, 수천 년 동안의 민족 정체성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삶의 중심이었던 공동체가 무너졌고, 그 시간 만큼 우리를 지켜왔던 삶의 법칙들과 질서, 가치관들이 단절되었다. 후손은 조상을 부정하고, 위정자는 백성을 부정했으며, 민초들은 서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해야 했다. 지금의 한국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이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으로 공공장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바탕으로 지나친 갑질을 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해지는 혐오와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전통적인 이념과 가치 갈등이 여전히 남아있는 위에, 계층, 세대, 성별, 학벌, 직종, 기혼자와 미혼, 유자녀와 무자녀..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갈등이 추가되는 느낌이다.
혼돈의 시대에 유일하게 작동하는 원리는 돈과 권력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들이 부정당하는 와중에 돈이야말로 생존투쟁에서 나를 상대방의 우위에 서게 해 주는 단 하나의 도구기 때문이다. 행복의 원천을 묻는 질문에 가족이라고 대답한 많은 나라와는 달리 한국인들은 돈을 선택했다.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나라도 한국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회. 먼저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당장 도태되고 마는 정글같은 분위기. 오로지 돈과 권력이라는 본능만 남아 이기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들. 한국사회에서 쥬라기공원을 떠올리는 것은 전혀 비약이라 할 수 없다.
혼돈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모든 문제의 답은 문제 자체에 있다. 갈등과 혼란을 다른 말로 하면 다양성이다. 급격하고 격렬했던 사회 변화를 거치며 한국에는 수많은 가치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관점만 조금 바꾸면 이러한 다양성은 가능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금은 혼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다양성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세상은 혼돈으로부터 창조되지 않던가.
한국사회의 문제는 이러한 다양성들을 갑자기 받아들이기에 여러 가지 변화들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는 데 있다.
왕조시대의 신민들과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같은 선거에서 투표를 하고, 해 뜰 때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던 산업화 시대의 역군들과 개인의 삶과 워라밸을 중시하는 청년들이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 ‘때 되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게 당연했던 조부모와 ‘나 혼자’ 사는 손자손녀가 명절마다 갈등을 빚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역할이다. 우리는 리더를 조직과 구성원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리더의 가장 큰 의미는 그가 지는 책임에 있다. 리더는 책임을 지는 존재다. 아무리 좋은 방향을 제시했다 해도 리더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면 규범과 기준은 힘을 잃고 집단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갑질을 하는 이들의 무리한 요구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법과 질서를 어기는 이들에게 엄격하게 원칙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었더라면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혼란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금의 혼돈은 괜한 시비에 말리기 싫다고, 공연히 피곤하게 일 만들지 말자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리더라고 해서 특정 조직의 리더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리더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그 권한도 크기 때문에 리더들이 나선다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좀더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신화시대가 아니다. 혼돈에서 창조를 이끌어내는 이가 전능한 신이어야 했던 시대는 예전에 끝났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 혼돈 속에서 새 시대의 새 질서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이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이 글은 공감 KGS_2023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