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과 학습된 무기력의 결정적 차이
셀리그만(Seligman)이라는 심리학자가 유명한 실험을 했습니다. 개 24마리를 8마리씩 세 집단으로 나누고 전기쇼크를 줍니다. 한 집단(A집단)의 개들은 쇼크가 오면 코로 레버를 밀어 중단시킬 수 있었고, 한 집단(B집단)은 뭘 어떻게 해도 쇼크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집단(C집단)은 전기쇼크를 주지 않았죠.
이런 경험을 하고 하루 뒤, 24마리의 개들은 동일한 환경에서 전기쇼크를 받습니다. 철로된 바닥으로는 전기쇼크가 오고 가운데는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의 낮은 담이 하나 있습니다. 담 너머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바닥입니다.
바닥에 전기가 통하자 자신이 전기쇼크를 멈출 수 있었던 A집단과 쇼크를 경험하지 않았던 C집단의 개들은 모두 담을 넘어 전기쇼크를 피합니다. 반면, 어떻게 해도 쇼크를 피할 수 없었던 B집단의 개들은 대부분(8마리 중 6마리) 담을 넘을 생각도 없이 앉아서 묵묵히 쇼크를 견뎠습니다.
셀리그만은 B집단 개들의 반응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의 결과라 설명합니다. 겪게 되는 고통에 어떻게든 대처를 해보지만 결국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학습된 무기력은 불행한 상황을 극복해보려 노력에 노오력을 거듭하지만 태생이 다른 금수저들에게 기회를 차단당하고 나아질 기미가 없는 현실에서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는 흙수저들의 심리상태와 상당히 유사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흙수저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흙수저의 심리가 학습된 무기력이라면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전기쇼크를 피하려하지 않는 개들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것이 고작이겠지요. 씁쓸하지만 이것이 한국의 미래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래서는 안되구요.
한국인 심리학의 지난 글에서 흙수저의 심리상태를 한국의 문화적 정서, 한(恨)이라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한(恨)이라는 것이 셀리그만이 이야기한 학습된 무기력일까요? 한과 학습된 무기력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통제력을 상실하는 학습된 무기력과
자신에게 닥친 받아들일 수 없는 불행의 원인을 결국 자신에게 찾음으로써 상실한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인 한(恨).
그 차이를 찾으셨습니까?
핵심은 통제력의 유무입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로 있는 학습된 무기력에 반해, 한(恨)은 인지적 왜곡이 있을지언정 통제력을 회복하려 시도합니다. 어차피 안 될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것이 한의 심리가 아니라, 이게 내 탓이니까 어떻게든 해 보자는 것이 한의 본질인 것입니다.
사실 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부분은 소홀히 여겨져 온 측면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恨)을 떠올릴 때 어둡고 침울하며 퇴영적인 이미지들을 상상합니다. 학술적으로도 '영구적인 절망이 낳은 체념과 비애의 정서'라든지 '불가항력적인 좌절상황에 순응한 감정' 등의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그러나 한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것은 한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한국학의 권위자 이어령 선생은 한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성취하려는 욕망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라 보았고, 이 외에도 한 자체보다는 해한(解恨), 즉 한을 풀려는 의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구요.
한이 무슨 개념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도 한(恨) 하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속담은 아실 겁니다. 여기서 한을 품은 것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이 서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오뉴월에 말이죠.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한국문화에서 한(恨)의 결정체는 보통 귀신으로 형상화됩니다. 한을 품은 귀신은 죽었음에도 저승으로 가지 못합니다. 이승에서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할 일을 마치고 나서야 귀신은 '한을 풀었다'며 저승길을 떠납니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 한이란 인간계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동기인 것입니다.
이 한(恨)이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한 동기로 작용할 때, 그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이 이룬 눈부신 경제적 성취는 '가난이 한이 되어 한번 잘 살아 보겠다'는 동기가 가져온 것입니다. 한국의 성장을 이끈 우수한 인재들 역시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내가 못 먹고 못 입더라도 자식만은 잘 가르친' 우리 부모님들의 의지가 없이는 나타날 수 없었겠지요. 이것이 바로 한(恨)이 가진 잠재력입니다.
흙수저의 한탄은 학습된 무기력이 아닙니다. 어딘가로 향하기 전 잠시 방향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의 유예된 동기이자 의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흙수저 신드롬에서 희망을 읽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직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동기로 작용할 한의 방향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한국의 현대사에서, 한은 개인적 성취의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잘 먹고 잘 살겠다', '출세하겠다',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살겠다' 등의 개인적 욕망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흙수저로 형상화된 우리들의 한은 개인적 욕망의 성취로 해결할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러한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노력이 벽에 부딪친 결과가 바로 흙수저 신드롬입니다. 그리고 흙수저가 불행한 원인이 단지 금수저로 제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게 된 헬조선은 저마다의 개인적 욕망들이 쌓이고 쌓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인들은 자신만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다른 이들과 다른 가치들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했고 내가 잘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았습니다. 내 성적을 위해 친구의 어려움에 등을 돌렸으며 내 집값이 오르기 바라며 가난한 이웃을 내쫓았습니다.
'나만 잘되면 돼, 나만 아니면 돼'가 많은 이들의 좌우명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 개인적 욕망의 결과가 우리가 사는 헬조선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순수할 수도 있는 개인적 욕망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다른 이들의 욕망을 짓밟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어느새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이상 개인적 노력이 개인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외면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외면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한 한의 극복방법은 결국 '노오력'을 통한 길밖에 없습니다. 물론 흙수저 중 일부는 노오력 끝에 흙수저를 벗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개개인의 노오력이 지금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제는 한을 해결하는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어떤 부정적 사건의 원인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긍정적인 면은 (...물론 이런 인지양식은 우울증의 위험으로도 연결이 됩니다만),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흙수저에게 필요한 일일 테지요.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 노력이라 귀인하게 되면 선택지는 급격히 좁아집니다.
하지만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 주변에 대한 관심이라면? 작은 변화를 위한 실천이라면?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습니다.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학습된 무기력이 아닌 할 수 있다는 희망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