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적 문화인식
얼굴색이 연탄색하고 똑같네..
한 나라의 여당대표의 말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했다는 이 말은 그가 평소에 다른 인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로이터 통신의 기자 제임스 피어슨이 남긴 트윗으로 이 사건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상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이것이 그 양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인종과 피부색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 사건이 이슈가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흑인은 무식하고 게으르다. 아프리카에 잘 사는 나라 하나 없지 않느냐."
"동남아 애들? 깜둥이들보다야 좀 낫지."
"백인이 가장 잘났지. 백인들 나라는 다 선진국이잖아."
한국에 퍼져있는 인종에 대한 '상식'입니다. 이런 상식들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국내 거주 외국인 150만명 시대, 명실상부한 다문화시대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인들의 문화인식은 아직 그에 걸맞는 모습이 아닌 듯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오늘은 인종에 대한 편견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지난 글(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2)에서 중세 시대의 문화인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유럽인들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죄인으로 봤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고 노예로 부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구요.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이상 다른 문화에 사는 이들이 '죄인'이라는 생각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우리들(유럽인)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었지요.
여기에 과학적인 설명이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진화론적 설명입니다.
생명체는 원시적인 형태로부터 고등한 상태로 진화한다는 이 이론은 생물학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입니다. 이 설명을 따라가 보면,
인간사회도 생물처럼 진화의 과정을 밟는데, 더 많이 진화한 종족이 있고 덜 진화한 종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유럽인들이 인류 진화의 정점에 서 있고, 그 다음에는 아시아인, 동남아시아 인 등이 있으며, 거의 진화하지 못한 이들이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사회진화론은 곧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됩니다.
유럽인들이 절대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국권을 빼앗은 게 아니라, 진화를 못해서 고통받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 병원도 세워주고 학교도 세워주고 철도도 놓아주고 했다는 거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습니다..)
실제로 당대 유럽인들은 그렇게 세계인들은 '돕는 것'이 백인들의 숭고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의 시 "백인의 의무"의 일부입니다..
“백인의 짐을 지어라/너희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들을 보내라/너희의 자식에게 유랑의 설움을 맛보게 하라/너희가 정복한 사람들의 요구에 봉사하기 위해.”
아무튼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유럽 열강은 전 세계를 갈라먹습니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반듯반듯 직선으로 돼 있다는 사실 아시지요? 얘네들이 무려 '위도와 경도'로 식민지를 분할한 흔적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식민지 국가들은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독립한 뒤에도 내전이다 쿠데타다 하면서 고통받고 있지요..
그런데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국가들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진화론으로 돌렸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힘을 기르지 못해 나라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식민지들을 거느린 제국주의 나라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음은 1900년 조선의 한 신문에 실린 사설의 일부입니다..
구라파 사람들은 가죽이 희고 털이 명주실 같이 곱고 얼굴이 분명하게 생겼으며 (중략) 황인종은 가죽이 누르고 털이 검고 거세며 이가 밖으로 두드러지게 났으며 흑인종들은 가죽이 검으며 털이 양의 털같이 곱실곱실하다. (중략) 백인종은 오늘날 세계인종 중에 제일 영민하고 부지런하며 담대한 고로 온 천하각국에 모두 펴져서 하등 인종들을 이긴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한국의 인종지도의 뿌리입니다.
제국주의가 날로 팽창해가던 구한말, 지식인들은 당대의 현실을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진화론적인 질서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기 때문에 나라를 잃는다. 그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어서 힘을 길러야 한다."
물론 틀릴 것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체화한 내용이기도 하구요. 우리의 선생님들의 선생님들의 선생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온 생각들입니다. 물론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에게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강한 편견이 심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깨달을 필요가 있지요.
2차대전으로 제국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사회진화론적 설명도 그 효력을 다했습니다. 어떤 인종이 우수하고 어떤 인종이 열등하다는 인식은 없어져야 할 편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인종과 문화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그 문화에서 온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비굴한 태도로 그를 대할 것이고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대할 것입니다.
남의 얼굴색을 연탄색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