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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과 헤어질 결심

아파봐야 정신차리지

by 원테이크


새 봄, 결혼 시즌이다. 동기 중 막내가 결혼한다고 해서 모처럼 차려입고 결혼식에 갔더니 반가운 동기들이 인사한다.


예전엔 정장을 차려입고 오던 멋쟁이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유모차를 끌고 온다. 이제는 제법 큰 어린이의 손을 잡고 오는 풍경을 보며 새삼 신기하다. 한창 많이들 결혼할 시절엔 결혼 준비가 이러쿵 저러쿵, 임신과 출산은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 이번에 떠오른 화제는 생애 전환기의 전후를 앞둔 우리들에게 닥친 건강 이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한창 체력이 좋을 이삼십대였지만, 이제는 조금만 무리해도 기력이 팍팍 달리고 근육은 없어지고 살은 두둑해진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어느 무리에나 건강 전도사는 있다. 자기계발에 진심인 동기가 운동 독려에 나섰다. 원래 열심히 사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번에 듣게 된 루틴이 꽤 자극이 되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를 뛰고, 영어공부를 하면서 뇌를 깨우고 아기 어린이집 보낼 준비를 하는 루틴으로 살고 있다니 이런 갓생이 있나?


그렇게 살면 삶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의심 반, 간섭 반인 주변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본인의 건강론을 펼친다. 오, 오랜만에 동족을 만나 반갑다. 아마 회사에서 나도 저러고 있겠군.


달리기 좋은데


우리 팀에서는 대체로 내가 꾸준히 운동하고 먹을 것을 유난히 신경쓰며 건강 챙기는 캐릭터다. 어쩐지 동료들이 내 앞에서 밀가루를 먹어도 되는 건지, 아이스크림을 골라도 될지 괜히 물어본다. 저런, 제 눈치 보지 마세요... 주변에 강요한 적은 없는데 본의 아니게 이런 저런 훈수를 두어버린 건지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또는 왜 이번엔 샐러드를 먹지 않느냐, 메뉴가 가속노화라서 어쩌냐 하며 한 마디씩 거들기도 하는데, "그렇게 먹고 어디 백 살까지 사시겠어요" 하는 비아냥 비슷한 소릴 들을 때면 채식주의자까진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딱 십 분만 달려보시면 좋아요', 라고 할 때는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호호'라고 들어주는 사람이 그래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먹으면 좋크든요', 하면 당신이 먹는 건 틀렸어요, 하고 들리나보다.


실은 자업자득이다. 마음 먹고 해야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대단하게 보이지만, 말 그대로 밥먹듯이 하는 밥 먹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의 철학이 이미 뚜렷하다. 그걸 건드리며 잔소리같은 건강 전도를 하려고 든 내 탓이지.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조상님 은덕을 많이 쌓으셨나봐요로 시작해볼 걸 그랬나?


이런 거 진짜 맛있는데..설명을 못 하겠네


난 원체 건강지키기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점심 먹고는 꼭 20분 빨리 걷기를 하고 어디 공원 벤치에서 아저씨처럼 팔굽혀펴기를 했다.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구내식당 밥을 '반만 주세요'하고 조금씩만 먹고, 짜장면 같은 건 특식라며 주말에만 먹었다. 걷는 걸 즐겨서 어디든 많이 걷고 주 2회 정도는 요가를 했다.


살려고 그랬다. 계획한 일을 해내기 위해 몸이 받쳐주어야 하니까 열심히 관리했다. 그럼에도 고질적인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나 급작스런 편도선염은 눈치 없는 친구처럼 늘 들러붙었다. 신기하게도 시험에 합격하자 그 거추장스럽던 질병들이 다신 찾아오지 않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운동은 완전 뒷전이 되었다. 새벽 세 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사무실에서 동트는 것을 보았다. 일요일 저녁은 늘 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체력도 좋고 건장해보이는 편이지만, 생활이 엉망이 되며 속이 곪아갔던 것 같다.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갔더니, 수술을 해야한다고 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일보다 중요한 게 있구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 중에, 누구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가족이라든가, 본인의 종교라든가. 급작스런 휴가를 내며 가족 때문이라고 하면 토달기 어렵지 않나.


건강도 마찬가지다. 건강하세요, 하는 덕담은 언제 어디서 써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직장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전문 서비스의 첨단을 달리는 곳들은 건강이 중요하단 걸 결코 '안다'고 할 수 없는 일상을 보내는 것 같다. 저녁 열 시 전에 퇴근 하는 건 비일상적이다. 주말 이틀을 쉬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우다.


언제는 같은 팀 주니어 변호사가 대상포진에 걸렸지만 휴가를 못내고 일을 했다는 무용담을 펼쳤다. 그 무시무시하게 아프다는 대상포진에 왜 걸리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상하게 그 이야기를 하는 주니어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있는 것 같다. 아픈 건 훈장이요, 건강을 챙기기 위한 모든 일들은 사치처럼 보였다.


아픈 일도 없이 힘들고 아파서 쉬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은 무능해보일까봐 하지 못했다. 능력이 안 되면 성실성과 태도라도 좋아야 한다는 회사원 마인드는 대체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그 마인드 덕에 결국 그 대단한 일을 멈춰야 할 정도로 병이 난 게 틀림없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내 딴에는 심각하게 아프고 현타를 맞았다. 미련하게도, 그 '충성하는 태도'는 아직 크게 고치지는 못했다.



대신 공부를 했다(역시 문제가 생기면 뭘 해야할지 몰라 책부터 펴듬). 스스로에게 무얼 먹여야 덜 아플지를, 어떤 생활이 문제인지를. 해부학과 뇌과학을 배웠다. 다이어트와 수면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관심있게 찾아보고 책을 읽는 게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건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건강은 몰아쳐서 벼락치기로 얻을 수도 없고, 돈을 주고 쉽게 살 수도 없다. 채소를 먹는 비중을 늘리고 설탕과 술을 절제하는 식생활이 필요하며, 주 몇 회의 운동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수면, 적정한 수면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다. 잘 먹고, 잘 움직이고, 잘 자고, 모든 카테고리에서 선을 넘지 않고 잘 살아야 건강해진다.


어떤 선은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정말 지키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의 선을 넘게 되던 그 곳을, 로펌을 나왔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달리기를 했다고?" 건강전도사 동기에게 다른 동기가 물었다.


"나 고지혈증 진단 받았었잖아."


모두가 알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지금 멀쩡한 몸이 당연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늙어 노쇠해지면 자주 아프고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다. 그런 상태를 미리 겪을 때가 기회다. 아직까지 크게 아픈 적이 없다면 럭키, 아픈 적이 있어도 럭키, 몸을 돌보라는 몸의 경고라고 보면 좋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걸 알게 되는 순간, 행동에 옮기기는 조금 더 쉽다.


건강을 뒷전으로 하고 일만 바라보던 그 '태도'를 다 접고 직장을 바꾼 건 딴엔 대단한 용기였다. 습관을 갖추기 도저히 힘든 상황에 있다면, 판을 뒤엎어보는 방법도 있다. 건강은 반짝이는 의지가 아니라 잘 쌓아가는 습관과 환경을 갖추어야만 긴 호흡으로 이어나갈 수 있음을 이제 안다.


운동하고 건강히 먹고 잘 자는 습관은, 자극적인 음식과 스마트폰의 쾌락을 조금 멀리해야 지킬 수 있다. 당연히 '대유잼'인 삶은 아니다. 자극과 무자극을 오가며 겪는 짜릿함은 없다. 대신 성취감이나 보람 같은 잔잔하고 안정적인 재미가 보장된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구운 과자류를 절대 안 먹는 것도 아니고, 가끔의 술자리에서 자제 못하고 마실 때가 종종 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근시안적이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다. 하지만 참회하고 나아지고, 매일 생각은 놓지 않고 노력해가는 거지.


그렇게 앞서거니 하다 가끔 후퇴하더라도, 내게 맞는 좋은 환경과 습관을 유지하고 싶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선형으로 올라가고 있을 나의 삶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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