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사이, 폭싹 멀었수다(2)
구남친(현남편)과 손을 잡고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는 그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다.
사법연수원에서 끼리끼리 잘만 만나 결혼하던데, 너 정도 스펙이면 의사랑 결혼하던데, 어쩜 남의 집 딸은 그렇게 잘나고 돈 많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지. 어떻게 집도 한 채 못 해오는, 듣도 보도 못한 출신의 남자를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는지.
엄마는 기가 막혔을 뿐이다.
"너는 내 프라이드고, 내 인생이고!"
'격'이 맞지 않는 금명이와의 결혼을 못 참겠다며 영범 엄마가 절규하는 장면은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PTSD가 온다.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만 한 엄마에게는, 자식의 인생이 곧 자신의 인생이었다. 세 자식 잘 키워 큰 딸 고시패스까지 시킨 것. 엄마에게는 최고의 칭찬거리이자 스스로의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때까지 매번 성적표를 갖다 바치며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는 착한 딸이었다. 그런 딸이, 다 키워놓고 나니 배신을 했다.
"배은망덕한 년. 키운 값 다 물어내라."
엄마의 억하심정이 어떤 논리에서 나오는지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걸 헤아릴 마음의 여유까지는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부모의 은혜를 거스르는 일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와 모진 말을 주고 받으며 매일같이 울었다. 살이 쭉쭉 빠졌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잘 사는 집'에 시집 가서 '편하게 살림이나' 하면서 사는 건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끌리는 사람은 비슷하게 '개천에서 난 용' 비슷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즈음 나는 스스로도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변호사네, 로펌 억대 연봉이네 하는 것이 모두 내 것일까? 엄마 아빠가 원하는 대로 착한 딸로 살다보니, 참 운이 좋게도 그런 훈장을 하나씩 달게 되었지만, 내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는 다시 내가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처럼 일이 되지도 않고, 야근은 고되고 힘든데, 나는 그 로펌 변호사 일을 삶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월급날의 금융 치료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생활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만 같은 걸. 그 안에서 스스로 겉돌고 있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런 껍데기에 맞추어 사는 게, 점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가던 차였다.
엄마는 그런 내 속은 몰랐을 것이다. 로펌 다니는 대단한 변호사 딸이 '쪽팔리는' 결혼을 하려고 악을 쓰는 게 무척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
키워낸 값을 물어내라는 것에는 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하는 걸까? 돈돈 거리는 엄마를 보며, 내가 무슨 대치동 학원을 다녔어, 학교 등록금을 내봤어, 용돈이 없다고 징징대본 적이나 있어, 대체 나를 왜 낳았어?... 라고 말하고 싶던 것은 꾹 참았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본전을 찾지 못하는 이야기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럴까, 싶은 나날이 이어졌다. 영범이 엄마가 금명이 엄마 애순에게 "이 결혼 말립시다"라고 말했을 때 애순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우리 엄마는 영범 엄마처럼, 구남친에게 전화로 본인의 뜻을 전했다.
엄마는 자랑스러운 변호사 딸의 앞길을 막는 그 남자에게 무슨 얘길 했는지, 아직도 난 자세한 이야기는 모른다. 다행히 구남친은 금명이만큼이나 똑부러졌다. 아마도 본인이 할 말은 똑바로 전했던 것 같다. 예비 장모가 듣기에는 발칙한 얘기였을 수도 있겠다.
그는 우리가 괜찮을 거라고만 했다.
마침내 우리는 결혼식을 잘 치렀다. 엄마는 환한 얼굴로 화촉도 밝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그 옛말 그대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우리는 서로 노력했다. 부모는 아닌 척 하면서 우리의 결혼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우리도 부모가 원하는 절차와 조건을 어떻게든 맞추어 보려 했다. 신랑을 갈아치우는 것만 빼고.
그 지난한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보듬는 세련된 딸은 되지 못했다. 다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주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엄마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엄마 역시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 탓을 하고 있었다. 그걸 결혼으로 상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았다. 지방 출신인 것도, SKY를 나오지 않은 것도, 해외를 못 나가 본 것도, 지금의 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게 없어도 '낙오자'가 될 일도 없다.
오히려 실무를 시작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회사에서 내가 써먹는 나의 재료들은, 새로운 걸 늘 호기심 많게 접하고 배우려는 태도나, 성실함이나 책임감이라든가, 다양한 사람들과 유연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은 오랜 세월 직장을 다니고 아이 셋을 훌륭하게 키운 성실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내 부모는 나를 어떻게든 바르게 키우고 공부 잘 시켜보겠다고 동분서주 노력하였고, 힘닿는 범위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부모가 원하는 삶'에서 어느 날 탈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온전히 독립하기까지는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나 혼자 이룬 줄 알았던 것들이 실은 혼자 이룬 게 아니었다. 그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느라, 이미 갖고 있던 것을 너무나 사소하게 여겨 지나쳐왔다. 내가 가진 것을 잘 몰라, 괜히 비교하고 속상해하며 살았다.
아기를 낳고 여전히 부모에게 보살핌을 받는 금명이에게 남편이 말한다. "내가 귤나라 공주님하고 결혼한 거 아닌가 싶어."
일을 하고 결혼을 한다며 소란스럽게 엄마로부터 독립을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아주 늦게야 깨닫는다. 실은 나도 귤나라 공주라는 걸.
아직도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폭싹 멀었수다.
폭싹 멀었수다 1편 읽으러 가기(아래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