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사이, 폭싹 멀었수다(1)
지난 봄 어딜가나 <폭싹 속았수다> 얘기였다.
다들 제주 사람인 날 보고 "그거 봤냐"며 묻곤 했다. 사실 난, 그 드라마를 애초에 외면해왔다. 50년 전 제주도 사람들이 주인공이면서 서울말만 쓰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와 딸 사이에 싸우다 웃다 울다 하는 줄거리라니, 듣기만 해도 벌써 피곤해졌다.
금명이가 제주도에서 육지로 대학을 가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며 겪은 그 모든 푸닥거리. 이미 내 인생에 재생되어 온 이야기였다. 결국 엄마와 화해하는 뻔하고 행복한 결말. 그걸 마주하며 울 내 얼굴이 싫었다.
그렇지만 이 긴 5월 연휴, 집으로 내려가는 비행기에서 결국 <폭싹 속았수다>를 틀었다.
애순이는 우리 엄마보다, 금명이는 나보다 한 스무살 쯤은 나이가 많은 것 같다. 금명이는 어려서 보리콩을 못 먹었다지만, 우리 세대는 콩 투정을 하면서 자랐다. 그런만큼 우리집은 금명이네처럼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삼형제 중 맏이로 홀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와서 진로 고민을 하는 금명이를 보니까, 돈돈 거리던 금명이 같던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엄마는 결혼할 때 마련한 신혼집 1층 빌라에 평생을 살면서 외벌이 살림으로 삼 형제를 키웠다. 어떨 땐 궁상맞고 어떨 땐 한없이 야무지게 알뜰한 엄마를 보고 자라 그런지, 돈은 늘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고학생도 전혀 아니었지만, 집에서 보내주는 용돈 30만원을 쪼개 쓰며 청약 저축을 넣었다. 학비 걱정도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등록금과 기숙사비 내본 적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누구에게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자랑이었다.
단 한 사람, 엄마 빼고.
오랜만에 보낸메일함에서 아주 묵은 메일을 보고 기가 찼다. 받는 사람은 엄마였다. 매 학기마다 메일로 성적표를 직접 보내드렸네? 육지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고 잘 살고 있다고 보고하듯.
딱히 효도하겠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언제나 누군에게 나를 증명하고, '알아봐주길' 바랐지만, 그런 속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엄마뿐이었다.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곽례 엄마에게 달려가던 애순이처럼, 나도 꽤 오랫동안 엄마에게 아기처럼 굴었다.
막상 고시에 붙고 나니, 이제는 등수로 매겨지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졌다. 14년의 기나긴 교육 과정, 그리고 3년 넘는 수험 생활. 성적과 순위, 합불합격으로 규정되는 단순한 세상이 지겨웠다. 법원과 검찰에 지원서를 넣으며 이 곳도 그 단순한 세상의 연장선에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더이상 갇혀 있기 싫었다.
판검사가 되면, 아빠의 고향 마을엔 2년 전 '누구누구의 딸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에 이어 다시 한번 판검사 임용 현수막이 걸렸을 텐데.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부모도 잘 알지 못하는 로펌 변호사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건 작은 반항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 전학을 가서 적응을 잘 못해 힘들어 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말했다.
"낙오자가 되면 안돼."
첫 직장에 다니는 딸이 다시 낙오자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엄마는 여전히 전전긍긍이었다.
"일은 힘들어도 억대 연봉이잖아."
숫자와 돈에 익숙한 엄마는 잘 하고 있다는 두루뭉술한 말보다 이 말에 곧 안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난 억대 연봉에 위안받지 못했다. 예전엔 딸이 학교에서 누구와 노는지, 얼마나 잘 하는지 시시콜콜 다 알던 엄마는 점점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져갔다.
성적의 세계를 벗어나자, 이내 '개천에서 난 용'은 열등감을 끼고 살았다. 어쩜 직장 동료들은 그렇게 다 서울 수도권 출신이고, SKY고, 회사에 서로 아는 사람도 많은 것 같은지. 그들은 있는 집 자식 같아 보였고, 외국에 한 번씩은 살다 온듯 했다.
회사 옆 백화점에서 동기들이 몇 백씩 하는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턱턱 사는 걸 보면서, 괜히 눈을 흘기며 '나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야' 하고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는 것도. 엄마는 잘 몰랐을 것이다.
못난 마음은 표가 난다. 돈 잘 버는 딸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들이 부러운 맘에 "자수성가 해야지" 하며 포부랄지 잘 살 거란 다짐이랄지 하는 것을 꺼내보이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니까 있는 집에 시집가라고 했지" 라며 갑자기 정색을 했다.
결혼한 지가 도대체 몇 년째인데, 엄마도 나처럼, 남들하는 결혼이 그렇게 잘나보였나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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