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월급쟁이로 살아보기(2)
인생을 통틀어 면접을 본 건 고작 네 번 뿐이다. 서울대 논술 면접, 탈락. 우리나라 1등 로펌, 탈락. 다행히 첫 직장과 지금 회사로 이직할 때 면접은 무사히 통과했다.
첫 로펌 면접 당시 나는 아직 어수룩한 모범생이었다. 대학 졸업 성적과 연수원 성적을 그럭저럭 갖추어 놓았지만, 경험은 얕았고 정보에는 느렸다. 자기소개를 하며 내세울 것이라곤, 성실함과 책임감 같은 흔해빠진 미덕이나, 학창시절 늘 학생회장을 도맡았다는 치기어린 자랑거리뿐이었다.
요즘은 가끔 면접관으로 지원자들을 마주한다. 아무래도 가장 파고들며 묻게 되는 건 '왜 이 회사인가'다. 아마 첫 직장 면접에서도 그런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왜 판검사 지원을 하지 않고 로펌엘 오냐고(회사 다니다 법원검찰 안 갈 거냐고). 도무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마음에 없는 지원 동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냈기 때문이겠지. 확실한 건, "돈 많이 주니까요"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돌아보면, 간절함을 가져본 건 대학교 면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론 모든 자리가 내 자린 아닐 것만 같았다. '되면 땡큐, 안 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지' 하는 루저 마인드로 임했다.
스무살이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갈 때 응당 가져야 할 설렘 따위도 가져본 적 없었다. 캠퍼스의 낭만이라든가, 로펌 전문 분야의 '라이징 스타' 같은 잘 나가는 파트너 변호사를 꿈꾸는 야망도 다 남일이었다. 어릴 적, 전학생인 내게 엄마가 했던 말, "낙오자가 되지 마라" - 그 한 마디는 만트라처럼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고, 잘 살아남자는 각오만을 할뿐이었다.
알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은, 로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기업 법무를 하면서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거래들을 접했다. 외계어같은 M&A 계약서와 금융 용어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졌다. 연수원에서 줄곧 연습한 건 원고가 그래서 이기는지 지는지, 이 피고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변호사가 되어보니 내가 속한 전문팀에서는 그런 사건은 거의 볼 일이 없었다.
동기들이랑 스터디도 해보고, 스스로 용어 사전도 정리해보고, 밤늦게까지 계약서와 실사 자료를 붙들고 씨름했다. 하지만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밑빠진 독에 물붓는 기분이었다. 그저 오늘 주어진 할당량을 데드라인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매일이 허덕임의 연속이었다.
실은 1년차 어쏘 변호사의 업무란 그런 것이다. 복잡하고 생소한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소위 짜친 일들을 하다보니 '그래도 어제보다 나아졌잖아' 하는 성장이나 효능감같은 걸 느끼긴 어렵다.
누군가의 지적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면서 에너지는 소진되고, 소득없이 갈리기만 하는 하루하루. 몇 달치의 월급에도 꿈쩍하지 않는 내 마이너스 통장처럼, 나의 작은 노력은 어떤 파문만을 잠깐 일으켰다가 다시 잠잠해지곤 했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대책없는 고민만 부풀어갔다.
그렇게 허덕이다 어느 순간, 통장이 차오르기 시작한 걸 알아차렸다. 다행이었다.
'그래, 난 또래에 비해 돈을 많이 벌잖아. 일은 어떻게 하든, 월급이 들어오고 있잖아.'
오로지 돈, 돈만이 그곳을 버티는 이유가 되었다. 설렘도 기대도 딱히 없이 살아온 어린 어른에게, 돈은 처음으로 내 힘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감각을 주었다.
그 돈으로 산 건, 그간 내겐 당연하지 않았던 큰 변화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장장 10년을 이어온 기숙사 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여섯명까지 같은 방에 살며, 누가 깰까 조심스레 방에 들어가는 것도, 샤워실 빈 자리를 기다리는 것도 끝. 방음도 잘 안 되는 도심 오피스텔 원룸방이었지만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시드머니라고 할 만한 돈을 모았을 때는, 자연스럽게 더 나은 집을 꿈꾸게 됐다. 이제 좀더 넓은 전세 원룸으로 이사가볼까, 생각만해도 두근대는 일이었다. 물론 첫 전세대출을 받으면서 맞닥뜨린 현실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집을 알아보고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상상하고 계획해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전세로 가면 돈이 얼마나 절약될까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것도 은근한 낙이었다.
'처음부터 월세보다 아주 유리한 건 아니지만, 매달 전세원리금을 갚아나가며 대출 원금을 줄여간다면 저축액을 전보다 더 늘릴 수 있겠군.'
'오...돈이 더 쌓이면 어떡하지? 금방 퇴사할 수 있을지도...?'
마침 그 시절은 서점 베스트셀러 서가에 '갭투자'로 성공한 사람들의 부자되는 법이라든가, 파이어족으로 살아보라는 류의 책들이 줄을 세우고 있던 시기였다. 투자를 시작해서 현금흐름을 '시스템화' 하면, 더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파이어'를 하고 '수동소득'을 취하면서 그냥 쉬는 인생은 얼마나 즐거울까.
겨우 사회생활 몇 년 했다고 곧장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런 책을 사서 열심히도 읽었다. 당시 유행하던 P2P 투자에 돈을 넣었다 채권이 부도나 완전히 잃어보기도 하고, 펀드의 펀 자도 잘 모르면서 투자랍시고 이런 저런 펀드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특히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 전월세 떠돌이를 얼른 청산하고, 서울에 정착할 곳을 찾고 싶었다. 나는 집을 좋아하니까 부동산으로 자산을 늘리고 부자가 되는 건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베스트셀러들은 하나같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면서, 정작 돈을 모으는 일이란 이렇게나 지겹고도 느린 싸움이라는 건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이제 막 전세 원룸으로 옮길만한 종잣돈이 모였지만, 집 한 채를 사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집을 사려면 시드머니를 불려야하고, 준수한 수익률을 올리는 투자를 열심히 공부해가며 오래 지속해야 그 정도 돈이 손에 쥐어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물론 소비를 더 줄인다는 아주 현명한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사치도 애써 안 따라가고 있는데, 해외 여행이나 외식까지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그건 바로 결혼.
전략적 M&A가 따로 없었다. 구남친(현남편)은 성실하고, 모은 돈도 있고, 사치도 하지 않아 나와 재무적 가치관이 꽤 잘 맞는 사람이었고, 맞벌이를 하면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은 선뜻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진행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이전 글을 읽은 독자라면 아시다시피) 우리 엄마는 고시 패스시킨 딸을 도저히 없는 집에 시집보내긴 싫었던, 영범이 엄마 과였으니까.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는 장장 1년에 걸친 설득과 생떼와 타협의 대환장 파티였다. 집엘 몇 번 내려갔다 오며 그 파티를 하고 있자니 마음의 곳간이 모두 바닥 났다.
여윳돈 통장도 슬슬 비어가기 시작했다. 간소하게 한다고 해도,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어떤 '격'에 매였다. 결혼식장, 반지와 스드메, 신혼 살림들까지, 돈이 나갈 일밖에 없었다. 재테크 책을 읽고 세미나를 가보던 에너지는 모두 결혼 준비로 빨려들어갔다.
사실 재무적인 관점에서 그 때 가장 에너지를 들여 고민했어야 하는 중요한 이슈는 신혼집이었을 것이다. 매수냐, 전세냐, 산다면 어디에 살 것이냐. 그러나 이미 마음과 돈 모두 쪼들리는 상태에서 선뜻 매수를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파트를 매수한다고? 그건 내가 좀더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던 것 같다.
일단 2년만 살아 보고 결정하면 되잖아, 하고 여느 신혼부부들처럼 전세를 택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집 욕심은 있어서 신혼집은 좋은 데서 시작하고 싶었다. 전세대출 까짓거 좀 내지 뭐.
마침 나와 남편의 직장 중간쯤 되는 곳에 좋은 신축 아파트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이름도 유명한 마래푸에 전세를 얻었다. 그게 두고두고 마음 쓰린 일이 될 줄은 그 땐 꿈에도 몰랐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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