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당신이 프로 출근러라면
한 때 자본주의 복음서와 같은 재테크 책을 읽었다. '학교에서 A학점만 받아온 당신, 사실은 이 자본주의에서 C학생일 뿐이다', '회사에서 노예로 살텐가 부의 추월차선을 타 볼 텐가!' 갑자기 월급쟁이로 사는 삶이 잘못되었나, 변화없이 안일하게 살고 있나 하고 마음이 불꽃처럼 타오른다.
하지만 뜨거워졌던 마음은 책을 덮은 다음 날이면 파삭하게 식는다. 오늘의 일상이 어제와 비슷한 평화로움이 좋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회사가 특별히 불편할 것도 없어졌다. 주변에 한 명씩 퇴사할 때 '이렇게 가만 있어도 괜찮은 걸까' 괜히 돌아보는 것 빼곤 말이다.
가끔 선배들이 했던 말을 나도 하고 있음을 느낄 때는 진짜 고인물이 된 기분이다. 특히 내가 입사하기 전 선배들이 겪었던 사람들에 관한 소회를 이야기할 때면 어느 고조선 시대일까...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이 팀에 누가 있었고 그 때는 사정이 이랬고, 하며 설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번 여름 휴가에 종종 업무를 확인하며, 새삼 예전만큼 힘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하고 첫번째 휴가 때 긴급한 일로 상사에게 카톡을 받았을 때는 불가피한 상황인 걸 알았지만 매우 화가 났다. 날 갈아넣는 악덕 사장이 감히 신성한 휴가까지 침범하다니(?). 그 때만 해도 회사와는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회사 없이는 생활이 안 되는 프로 출근러가 되었다. 점점 회사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회사에서 세 끼 밥을 꼬박 다먹고, 사내 카페에서 커피도 해결하고, 운동도 회사에서 하고. 휴일에 일이 생길 수도 있지, 급한 일이 내 시간을 잡아 먹을 수도 있지, 하고 어느새 대단히 타협하는 마음으로 산다.
마의 3, 6년차를 잘 보내고 회사와 평화 협정을 유지하는 시기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시기에는 회사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가 대체로 균형을 이룬다.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일"이야 하고 의연하게 구는 한편, 회사 일을 남이 시키는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내 일"임을 인정하고 내 걸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한 때는 회사는 돈벌이 수단일 뿐이고, 퇴근한 이후의 내 삶의 에너지도 앗아가 도대체 워라밸에서의 '라이프'를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다 여겼다. 그렇지만 회사 생활을 몇 년 넘게 하다 보니 그 라이프랄 거 생각보다 별 게 없다. 내게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주어진다면 뭘 하고 있을까, 답할 수 없었다. 과연 어떤 라이프를 원하는지 스스로 정의내리지 못하는 상태였을 뿐이다.
그 때부터 '일 잘 하는 법'이나 직장 생활을 다룬 책을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만큼의 열정을 갖지 못한 나같은 사람도 현실적으로 잘 살아가는 방법론을 알고 싶었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반문을 당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느냐고. 당시 한창 유행했던 신수정 작가의 <일의 격>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 또한 그런 사람은 절대 그 일만 계속하지 않는다. 더 큰일을 하게 되며, 그렇게 일하는 것이 몸에 익어 더 큰일을 맡거나 자기 사업을 해도 역시 비범하게 한다.
- <일의 격>, 신수정
회사에서 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사회생활 저년차에게 주어지는 '짜치는' 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로펌 주니어는 거래 종결 서류가 빠짐없이 첨부되었는지 수백번 다시 보느라, 이 나라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희한한 법령들을 리서치하며 실사보고서의 한 꼭지를 채우느라 시간을 보내니 '갈려나간다'는 억하심정을 다스리기 바쁘다.
그런데 한 5년차를 넘어 뒤돌아보니 그 모든 자잘함이 어떤 선을 그려오고 있던 것 같다. 끝까지 밀어부쳤던 일은 어떤 형태로든 내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혼자만의 분투를 그만 두고, 어차피 하루에 기본 여덟 시간을 갈아넣어야 한다면 남길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일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판단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 그렇게 파고들어야할 사안은 몰입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은 적당히 자르고 거절함으로써 에너지를 배분했다. 이메일이나 검토의견을 쓸 때는 읽을 사람 입장을 좀더 섬세하게 고려했다. 정리된 의견과 시행착오 모두 요약하고 기록해두었더니,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하며 그 자료를 쉽게 참고한다.
여전히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길은 멀고, 회의에서 내 뜻을 잘 전달하는 방법은 고민스럽다. 그래도 조금씩 회사 생활을 통제해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나도 모르게 일에 과몰입이 되거나 감정이입을 하게 될 때는 그야말로 폭주상태가 된다.
퇴근길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집에 걸어가기도 하고, 동료를 붙들고 한참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회사가 원망스럽고, 출근길에 그냥 무슨 일이 벌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이럴 땐 어디까지나 이거 "회사일이야"하고 잠시 떨어져보려고 한다. 또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선배와 동료들 덕분에, 다시 정신을 번쩍 차린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끔씩 현타 맞고, 다시 마음 추스리고 하는 것도 나의 라이프다. 매일 힘든 것도, 매일이 즐거울 수도 없는건 어디서나 같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내가 정녕 원해서 벌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이 자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삶과 일은 따로 봐야한다거나, 일하는 여덟 시간을 내 시간이 아닌 것처럼 대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워라밸이란 말을 온전히 용납하지 못하는 진정성 있는 꼰대가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