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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변은 로펌 쓰고 놀면 되지 않냐구요

위임하는 사람의 입장에 관하여

by 원테이크


결국 지고 말았다.


패배감에 우울해 하는 건 하루로 끝내야 한다. 쓰리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복기하고 그 다음을 어서 준비한다. 항소하기로 결정되었으니, 가장 먼저 할 일은 항소장 준비다.


항소장 작성은 간단하다. 직접 하는 소송이 아니라서 대리를 맡은 로펌이 준비한 초안을 쓱 검토만 하면 바로 제출할 수 있다. 눈으로 훑어서 오케이, 하면 되겠지 했는데 이상하다. 한 장짜리 문서에 몇 군데나 틀려있다.


비싼 수임료를 냈건만 어째서 일은 내가 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막판으로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안 그래도 져서 마음이 울렁대는데 인내심이 한계를 오락가락한다.


이런 것도 제가 일일이 챙겨야 합니까, 하고 야단을 치려다 점잖은 클라이언트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본다. "이 부분 확인 부탁드립니다." 하고 겸손인지, 위선인지, 비즈니스 매너인지를 장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누군가와 협업하는 게 얼마나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인지 새삼스럽게 그 어려움을 짚어보게 된다.




우리 팀은 자체적으로 소화하는 업무가 대부분이다. 소송보다 내부 자문이 많고 빠른 호흡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소스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유로 로펌을 선임하여 협업을 한다.

로펌은 말하자면 기업 법무팀의 거래처라고 할 수 있다. 거래처에 제대로 일을 시키고 업무 결과물을 점검하는 게 법무팀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1. 먼저 일을 잘 맡기려면 어떤 이유로 대리인을 써야하는지 먼저 판단해야 한다.


우리 인력이 부족하여 간단한 업무를 아웃소싱해야하는 경우,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경우, 내부 의사결정의 근거 자료로 써야하는 경우 등 니즈를 명확히 정리해야 어느 전문가를 찾아갈지 방향성이 잡힌다.


어딜 선임할지는 매번 어려운 일이다. 건 바이 건으로 쟁점과 할 일이 달라지니, 그 일을 잘 할 만한 데가 어디고 어느 누가 잘 하는지도 쉽사리 알 수 없다. 완벽한 적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여러 군데 협업하고 슬슬 업무 경험이라는 것이 생기며 조금씩 구별해 나간다. 팀 내부에 쌓인 협업 데이터를 토대로 평판 조회를 해보면 대략 걸러진다.


2. 선임한 다음은 넋놓고 있지 말고 '일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단순 업무 아웃소싱의 경우라면 대체로 믿고 맡기는 데 큰 이슈는 없다. 그렇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누구랑 일하든 마찬가지겠지만, 일잘러는 상대방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준다. "내가 하고 말지"가 되지 않게 상대가 상대의 몫을, 내가 내 몫을 잘 하면 일이 잘 돌아간다. 그 몫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은 곧 신뢰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곳은 시간도 갉아먹고 에너지도 앗아간다. 당신은 여기까지 하셔야해요, 하고 일일이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소통 과정에서 상대의 몫이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제대로 일을 하는 파트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캐치하고 전문가로서의 검토 의견을 적확히 제시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데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구요'를 여러 번 물으며 옆구리를 찔러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일의 결과를 살핀다.


사내변이 되고 나서야 로펌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잘못된 결과를 내놓는 경우를 malpractice라고도 한다.) 특히 우리 팀에서 로펌에 맡길 정도면 복잡하고 답이 없는 생소한 이슈이기도 하며, 원래 법의 해석과 적용이란 게 무자르듯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닐 때가 대부분이다. 같은 사안을 다른 곳에 물을 때도 있는데, 정반대의 견해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법리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클라이언트의 구미에 맞는 해석을 가져온다한들, 결국 규제기관이나 법원같은 제3의 입장에서 해당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나도 웬만하면 어련히 잘 해왔겠거니...하고 믿고 싶어 하는 나약한 인간인 편이라, 의식적으로 안경을 바꾸어 끼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따져보려고 매번 노력한다.


그리고 법리적으로 적절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해도, 문서화된 의견이나 계약서라는 결과물을 그대로 수용할지 또다른 시각에서 살펴야한다. 그 일이 전체적인 사업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인하우스에서만 정확히 알 수 있다. 전체적인 틀부터 세부 표현이나 뉘앙스 하나의 차이가 그간 쌓아온 회사의 입장과도 부합하는지,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도 걸맞을지 크로스체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면 그 사람이 내 손과 머리가 되어주길 바라게 된다. 하지만 현실의 대리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책임의 끝은 나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항소장 한 장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수에 짜증이 났지만, 일을 맡기는 사람에게도 감당해야할 무게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내변호사에게 로펌은 신체의 연장과도 같다. 손끝이 조금만 어긋나도 전체 동작이 삐걱댄다. 그래서 외부 파트너를 다루는 일은 단순한 위임이 아니라 협업이며,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 일이다. 어느 순간에는 상대의 리듬을 믿고, 또 어떤 때는 내가 방향을 잡아야 한다.


결국 로펌과 일하는 건 일을 덜어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잘 시키기 위해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사내에서 일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회사가 무엇을 진짜로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의 몫이고, 그 이후는 맡길 수 있는 부분인지를 구분하는 감각이 쌓여야 한다. 그게 인하우스 법무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늘도 누군가의 문장을 고치고, 또 내 일의 경계를 다듬으며 배워가고 있다. 손끝에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남는다.


그러니 사내변호사가 ‘로펌 선임해놓고 꿀빤다’는 오해를 하셨다면 이제 그 생각은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려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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