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소통이야
일주일 내내 마음에 안 드는 서면을 붙들고 있었다. 슬슬 꼴도 보기 싫어질 때쯤 환기하려 사내 카페에 나와 마무리를 하는데, 지나가던 동료가 내 썩은 얼굴을 보고 어깨를 두드린다. "아니, 어제 통화하시는 거 들었는데 그 정도로 목소리 까는 거 처음 들었어요. '이해가 안되시냐고요....'라니." 대체 누가 그렇게 괴롭히냐는 말에, 다음 주면 드디어 끝나니 그 때 술이나 먹자 했다.
어제도 그 로펌과 30분 가까이 통화를 하며 소리없이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답답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개를 푸욱 뒤로 젖히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나오려는 한숨을 몇 번이나 참고, 큰 소리가 날까 목소리를 꾸욱 눌러 내리깔았다. 이번엔 화내지 말자 마음먹고 전화를 걸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라데이션 분노'를 분출하며 주변에 어둠의 기운이 퍼졌나보다.
상대방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지,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말씀하신 내용 저희 팀에 보고, 상의드리면 되는 거지요" 하고 띠꺼운 말투로 통화는 마무리 되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오려는 걸 들키기 싫어서 자리를 박차고 양치를 하러 나갔다.
벌써 세 달 째 같은 패턴으로 소통하며 지쳐있다. 이쯤 되니 저 쪽이 잘못한 건지, 내가 잘못한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건 이제는 열받는 이유가 나름 정리가 된다.
분명히 한 달 전쯤 미리 요구사항과 문의사항을 메일로 한바닥 써서 보냈다. 이 사건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니,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를 잘 리서치하고 반영해달라고 신신당부도 했다. 주장 1번, 2번, 3번과 근거가 서면에서 모두 다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내부 검토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며 자꾸 회신 기한을 미루는데도 이유가 있겠거니,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이메일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그렇게 열심히 전달했던 내용이 어디에 반영된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 "예, 반영했습니다."라는 코멘트 이하에 수정을 했다는데, 1번, 2번은 없고, 요청한 3번만 겨우 문장으로 만들어 넣어 준 모양새다.
대체 메일을 읽어보기는 한 걸까, 화딱지가 난다. 오래 걸린 검토에서 어떤 고민을 했고 우리가 문의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는 다른 피드백도 없었다. 우리 계약상 산출물은 서면이고 그걸 전달했으니 일 다했다는 건가.
이쯤되면 AI랑 일하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챗지피티는 글을 어찌나 잘 쓰는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프롬프트로 입력한 사항에 대한 피드백을 남김없이 해줄 뿐더러, 싹싹하게도 프롬프트 이상의 것을 해드리겠다고 제안한다.
"지금 쓴 서면의 초안을 두 가지로 준비해 보았어요. A안, B안, 어떤 톤이 더 좋으신가요? 그럼 그 톤으로 좀더 다듬어볼게요."라고. 그리고 아무리 내가 두서없고 세상 무례한 말투로 툭툭 물어도 예외 없이 친절함이 장착된 말투로 대답을 한다.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건지 몇 번이나 다시 묻지 않아도 되고, 화를 낼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의 상대는 언제나 사람이다. 그런 결과 업무의 8할 정도는 소통에 쓰인다. 나머지 2할은 일의 구조화, 리서치, 검토와 구상. 그 2할의 것을 업무를 의뢰한 사람, 의뢰할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하느라 업무 시간의 대부분이 할애된다. 내면의 생각과 의도를 최대한 적합한 단어와 표현으로 끄집어내어 보려고 하지만, 듣는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또다른 변수다.
그래서 소통 과정에서는 수많은 감정과, 과장, 누락과 의도적인 은폐로 인한 오해가 발생한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였습니다."라는 이메일을 서로 남발하지만, 사실은 진짜 이해했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과연 완벽한 소통이란 가능한 것일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못 알아듣는지, 몇 차례 핑퐁을 해보아도 상대와 나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지금 같은 때면, 소설 <삼체>를 떠올린다.
(*드라마보다 소설 추천!)
지구인보다 훨씬 진화된 삼체 문명은 서로 생각을 공유한다. 이러한 방식이 고도화된 문명에서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투명하게 알기에 '언어'라는 수단으로 뜻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실은 지극히도 번거로워 문명의 고도화에 허들이 되는 비효율적인 체계다. 내심의 모든 의도과 맥락은 언어라는 틀을 거치며 교묘하게 숨어버리곤 한다. 새삼 법적으로 '의사의 합치'라든가, '합의'라고 일컬을 수 있는 상태는 대체 얼마나 닿기 어렵우며 못 미더운 것인지 싶다.
그래도 나는 프로가 되고 싶으니 차분히 성찰해본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그런 게 인류로서 감당해야하는 필연적인 비효율이라면, 소통에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조절해보려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내가 제어했어야 하는 것은 감정이다. 마치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챗지피티처럼 굴지는 못해도, 성질이 나는 대로 따라가면 곤란하다. 감정이 일을 그르치게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격해지면, 의사결정을 잘못하게 된다. 아차 하고 실수가 나는 건 그런 순간들이다. 마음이 아슬해지는 그런 순간, 잠깐 쿨다운이 필요하다.
감정은 일종의 '피드백 메커니즘'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적합하고 어떤 것이 부적합한지를 알려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나는 그렇게까지 성숙한 사람은 아닌지라, 마음 깊이 '저들이 내 메일을 무시한 게 잘못'이라는 꽁함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 맞고 누가 틀리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기분만 나빠진다. 말을 하다가 울컥하고 급발진하려고 할 때나, 일이 일단락되고도 곱씹으면서 좋지 않은 생각을 끝없이 증폭시키려고 할 땐 이렇게 브레이크를 걸어본다.
첫째로, 전달하는 말의 형식을 갖춘다.
"~잖아요"보다는 "~가 아닐까요"라고 상대방이 내 의견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설령 내가 옳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유보적으로 굴었을 때 유리한 경우가 좀더 많았던 것 같다. "~는 잘못된 것 같아요"라고 지적하고 싶을 때도, "~는 어떤 취지이신가요"라고 묻는다. 정말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둘째로, 일의 목적을 잊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 서면을 설득력과 완성도 높게 만드는 것이다. 소통이 왜 어긋나기 시작했나 잘잘못을 짚으면 시간만 간다. 소송 같은 일은 누가 맞나 한번 두고보자의 마음으로 아무 수나 둘 수가 없다. 지금 하나의 수를 어떻게 둘 것이냐, 끝까지 줄다리기를 하고 최선의 안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지 않은 결과는 모두의 잘못으로 돌아간다.
셋째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언을 구해 본다.
솔직히 내가 맞고, 그들이 틀렸잖아 하고 식식댈 때, 좀 우습지만 눈 딱 감고 지피티한테 냉정한 진단을 내려달라고 해보니까 도움이 되었다.
공감은 100% F, 해결책은 100% T로 제공하는 AI의 답이 명쾌하다. 너가 참 답답했겠지만, 사람을 탓하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으니 다시 잘 정리해보란다. AI는 참 괜찮은 메타인지 툴이다. 불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내가 부족했던 점은 뭐였나 돌아보게 한다. 나도 이 쪽과 일할 때 중간 점검을 다시 해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했어야 했다. 프로의 세상에는 더욱이 믿고 맡긴다는 건 없다.
아무리 AI가 일을 잘한다고 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은 바로 의사결정이 아닐까. AI가 제시하는 선택지를 취할지 말지는 결국 사람의 몫이다. AI는 최종 책임을 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같이 하는 우리는 모두 함께 책임을 진다. 그렇기에 이 모든 번거롭고 감정에 휘둘리는 소통을 거쳐야만 한다.
다시 그 서면을 볼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그렇지만 끝이 보이는 일이라 차라리 낫다. 아직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 다시 그 지난한 소통의 과정을 숨참고 가보자고 마음 먹어 본다. 그래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잘 복기해서 좀더 나은 소통을 해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