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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by 원테이크

기내식은 정말 맛이 없었다. 닭고기에 끼얹어진 짭짤하고 끈적한 소스가 싫어 물을 부어 다 씻어냈다. 입가심을 하려고 받은 커피는 탄 맛이 난다. 올해 유독 해외를 나가는 일이 잦아 슬슬 피곤해지던 차였다.


자의로 나선 것이 아니란 점에서 이번 여행은 상당히 특별했다. 회사에서 가는 출장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해외 세미나로 평소 드문드문 뵙던 분들과 단체 버스를 타고 다니며 단체로 먹고 단체 행사를 치렀다. 인솔자가 따로 있어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었지만, 다소 서먹한 분들과 종일 함께 다니면서 주제를 널뛰기하는 대화로 사교를 도모하는 게 나름 가장 신경쓰이는 업무였다.


오랜만에 이런 환경에 처했더니 대외용으로 장착한 외향성이 곧 용량 부족에 시달린다. 대형 버스라 좌석 두 자리나 혼자 차지할 수 있던 것은 얼마나 다행이던지.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같이 보자며 말을 시키는 가이드 님께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잠시나마 지역 방송을 벗어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눈을 감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잭 존슨의 앨범을 틀었다.




하지만 나만의 평화는 곧 깨지고 만다. 그냥 창 밖을 보면서 조용히 가도 괜찮은데, 여행객을 혼자 적적하게 두는 것은 아마 가이드의 직무 유기일 것이다.


붙임성 좋은 현지 가이드 분은 이 곳에 온지 얼마나 되었고, 그 전에 있던 나라에서는 얼마나 살았다는둥, 벌써 일한 지가 30년이 다 되어간다는둥 만담을 늘어놓는다. 간혹 나의 반응을 살피기는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내가 진지하게 관심이 있는지보다는 혹시 여전히 지루해 하고 있진 않은지 잠깐씩 살피는 목적이다.


"저는 그 때 그저 매일 아침 바다에 가서 누워 한참 여유나 부리다가 슬슬 일하러 가곤 했다니까요?"


"아 호주요, 너무 좋은 곳에서 지내셨다~ 저도 여행갔을 때 아침부터 현지인처럼 일찍 일어나서 러닝하고 커피마시고 그랬더니 정말 좋더라구요."


"저는 러닝은 안 좋아하는데, 그냥 바다에 가서 책 펴놓고 그저 있다가 일하러 가는 거에요. 어찌나 좋았던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동조를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조금 무안해진다. 같은 패턴으로 들어오는 써브에 나는 슬슬 대화의 의지를 잃어갔다.


'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중에 특히 내가 잘 못 견디는 유형이 있다. 딱히 상대방이 궁금해 하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의식 없이 줄줄 늘어놓는 사람들. 보통은 자기 자랑이나 자의식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할 말이 없어 어색할지언정 별볼일 없는 대화를 연명해나가는 게 오히려 덜 괴롭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것도 괜찮다.


그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왜 나는 그들이 괴로울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각에 빠졌다.


우선 도무지 어떻게 호응해야할지 모르겠는 내 탓이다. 그들이 기대하는 반응이 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대략 "어머,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우와, 그렇게 오래 일을 하셨다고요? 동안이시다~ 참 멋있으세요", 라는 텅 빈 칭찬을 해야만 것 같다. 마땅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화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싶다는 이상한 책임감이다.


그런데 굳이 내가 반응해주어야 하지 않는 때에도, 다른 사람한테 하는 얘기가 건너 들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어째서 상대방의 반응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남 이야기는 가로막고, 듣기보다 말하기만 하며 대화를 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는지 잔뜩 불만이다.


그 불만에는 사실 나의 자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왜 당신은 "나처럼" 애쓰지 않는 건가요?'


하지만 가면을 쓴 나는 속시끄러운 내적 갈등을 영원히 숨긴다. 속으로는 그렇게 음흉하게 불만을 품고서는, 겉으로는 웃으며 말한다.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제 내가 진짜 피곤한 이유를 알았다. 겉과 속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진심으로 리액션하고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주어야한다는 강박만을 갖고 있을뿐.



문제는 표리부동한 성격 탓이로군. 비행기 백색소음에 힘입어 시작했던 성찰의 시간은 이만 접고, 이번 여행에서 보기 시작한 넷플릭스 영화를 마저 틀었다.


지난 여행 때는 뒤늦게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명작의 감동에 빠졌는데, 이번에 본 명작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대사 하나하나 이해하기 쉽지 않으면서도, 꿈속에서 보는 것 같은 장면들의 연속에 머리가 뒤집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 뒤틀림과 기묘함에 빨려들어갔다. 후반부로 가며 드러나는 메시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랑을 말하다니. 내 속만큼이나 정신 사나운 것 같은 이 영화의 주제도 <나의 해방일지>와 같은 것이라니. 이 영화도 사랑을 선택하라는 주제를 말한다. 사랑하기로 결정해 보라고.



Please be kind.


웨이먼드의 간절한 호소에 온통 악해졌던 에블린이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영화에 등장한 모든 크고 작은 인물들이 지나가듯 했던 말에 그들의 결핍이 있었다. 그 결핍을 그러안아주면서 에블린은 세계와 화해한다. 돌멩이가 되더라도 너랑 같이 굴러떨어져서 함께 있을 거라는 에블린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마지막엔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사랑을 하기로 마음 먹기, 거기까진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사랑을 실천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너무 불완전하고, 당신이 '나처럼' 하지 않는(예컨대 배려라거나) 것을 보며 당신을 쉽게 '옳지 않다'고 판단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어느 여행의 순간은 달랐다. 전망대에서였다. 혼자 있고 싶어 옆 사람이 있든말든 그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이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아서 내려놓자마자, 아니나다를까 굳이 "커피가 참 고소하죠?"라고 말을 거는 가이드. 글쎄요, 사실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었는데.


"아, 예, 뭐...

근데 호주에서 먹었던 게 너무 맛있었던 것 같아요."


애써 그분과 공통 분모를 다시 찾아 이야기를 꺼냈다. 의외로 그 다음 대화는 좀 즐거웠다. 좋아하는 곳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술술 알려주시기 시작하니 흥미가 생겼다. 골드코스트는 무엇이 좋고, 가볼만한 다른 도시는 어디가 있고. 경유할 곳만 잘 알아보면 비행기표가 매우 쌀 수 있으니까 알아보라고. 알려주기 좋아하고 실제로도 정보가 많은 사람들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구나.


AI는 내가 시키는대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준다. 하지만 SNS에서 보았는데, AI와의 대화로 AI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위험한다는 의견에 공감이 되었다. 거의 무결해보이는 기술과는 달리, 실제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도 좋고 나도 좋은 교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교집합. 그 사람에게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도 결국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만큼 나온다. 그러면 상대방의 말이 쓸모 있든 없든 그 순간 즐거울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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