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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래 Aug 23. 2024

생일이 기다려졌으면 좋겠다.

part 4. 시간

12월 20일.

참 애매한 날이다. 크리스마스와 5일 차이, 한 해의 마지막 날과는 11일 차이. 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온갖 기념일과 겹쳐 있는 날에 태어났다. 오죽하면 엄마가 너랑 사귀는 사람은 연말 챙기기 참 피곤하겠다, 라고 할 정도.


몇 해 전만 해도 열아홉의 종지부를 찍을 미성년자로서의 마지막 생일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생일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연말'이라는 한 해의 끝맺음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는다는 왠지 모를 무게감 때문일까. 생일을 맞이함과 동시에 달려온 1년이 끝나는 꼴이라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주르륵 머릿속에서 지나가기도 한다.


연말만 되면 내가 한 해동안 한 게 뭐가 있나 싶어 멘붕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더 심하다. 한 해 동안 찍은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스크롤하며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지 않나, 그동안 받았던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지를 않나. 아주 혼자 추억 속에 빠져 산다. 누군가에겐 연말이 후련한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정말이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손님 중 하나이다.


봄이나 여름 즈음에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일상의 환기도 되고 쉬어가는 느낌도 들지 않았을까. 하필 날도 추워서 감상에 젖기 딱 좋은 때에 태어나서는 남들은 환한 미소로 연말을 맞이할 때 나는 미묘한 감정과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생일, 크리스마스, 연말을 릴레이로 맞이해서 몇 주 간은 조금 즐겁기도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부담감을 잊을 만큼 연말은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을 준다. 캐롤이 흘러나오는 카페와 집 안에 소소하게 걸어놓은 크리스마스 장식, 12월 31일 12시 59분 즈음 초를 켜둔 채 기다리는 케이크까지. 그 여운이 너무 길어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사실만 빼면 나름대로 완벽하다.


지난 몇 해는 정말 연말이 오는 게 싫고, 1월 1일에 듣는 제야의 종소리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동안 보낸 해들이 의미가 없었던 건지, 뭔가 이뤄낸 게 없다는 사실에 주눅이 들었던 건지 원인은 늘 그렇듯이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연말이 기다려진다. 만두도 쪄질 것 같은 습한 날씨에 오히려 겨울이 기다려져서 그런 건지 올해 연말은 후련하게 흘려보내 줄 수 있을 것 같다. 한 해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감정은 그 한 해가 나에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올 해는 나에게 지루할 정도로 평온해서 빨리 보내주고 싶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폭탄처럼 터지는 삶보단 차라리 평온한 삶이 낫다고 생각해서 매년 31일에 케이크 초를 끌 때마다 '좋은 일은 없어도 되니까 나쁜 일만 없게 해 주세요. 아무 일도.'라고 빌었던 건 사실이지만 신이 내 소원을 너무 정직하게 이뤄준 게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다음 해는 지나치게 고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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