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학습되는가

뜨거운 난로의 앉은 고양이

by NT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뜨거운 난로 위에 한 번 앉았던 고양이는, 다시는 뜨거운 난로 위에 앉지 않는다. 현명한 일이다. 문제는 그 고양이가 다시는 차가운 난로 위에도 앉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데인 고양이의 뇌에는 단순하고 강력한 공식이 새겨진다. '난로 = 위험.' 난로가 차갑든 뜨겁든, 계절이 바뀌었든 상관없다. 그 공식은 삭제되지 않는다.


고양이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뇌가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방어 전략이다.




대출금 1,000만 원으로 현물을 굴렸다. 몇 달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간신히 원금을 복구했다.


그때 느낀 건 안도가 아니었다. 허기였다.


뇌는 이미 더 크고 빠른 자극에 중독되어 있었다. 원금 회복은 끝이 아니라 재출발 신호였다.


나는 선물 시장으로 진입했다. 레버리지를 걸면 버튼 하나로 수십 배를 굴릴 수 있는 곳. 작은 움직임이 전 재산을 순식간에 바꿔놓는, 초정상 자극의 극단이었다.




그날 밤, 나는 술에 취해 있었다.


5천만 원짜리 포지션을 열어둔 채 침대에 누웠다. "설마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한폭탄을 껴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앱을 켰다.


화면은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니었다. 텅 빈 회색이었다.


강제 청산.


밤사이 시세가 급변했고, 5천만 원은 몇 시간 만에 공중분해되어 있었다.


어제: 자산 있음.

오늘: 자산 소멸.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불일치는 내 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충격이었다.




극단적인 공포 앞에서 뇌는 정교한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편도체가 이성의 회로를 차단하고 즉각적인 생존 반응을 내린다. 불이 난 건물에서 복잡한 경로를 계산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뛰듯, 뇌는 가장 단순한 패턴 하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내 뇌가 지목한 범인은 '잠'이었다.


돈이 사라지고 있는데, 너는 자고 있었다. 네가 잤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내 신경망에 잘못된 연결이 불도장처럼 찍혔다.


수면 = 통제

상실 = 파멸.


명백한 오류였다. 잠을 자서 망한 게 아니라, 위험한 판단을 해서 망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포에 잠식된 뇌에게 그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진실이었다.


뇌는 반박을 원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날 아침 같은 일을 겪지 않겠다는, 그 하나의 명령만 수행하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내 삶에 기이한 저주가 걸렸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누우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몸은 녹초인데 뇌가 잠들기를 거부했다. 눈을 감는 순간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아무 투자도 하지 않는 날에도, 계좌를 비운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뇌는 여전히 초병처럼 잠을 지키며 서 있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간신히 잠들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건 보호가 아니었다.

형벌이었다.


취해서 잠든 그날 밤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뇌는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나를 벌했다. 매일 밤, 잠들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는 뜨거운 난로에 덴 고양이를 끌어안고 "왜 그때 난로에 올라갔냐"며 매질을 했다.


상처 입은 존재에게 필요한 건 채찍질이 아니라 치료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고양이의 트라우마를 고치는 방법은 때리는 게 아니다.


차가운 난로 앞에 데려가 천천히, 반복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잘못 새겨진 공식은 고통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으로만 덮어쓸 수 있다.


나는 그 재교육을 한참 뒤에야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고양이를 혼자 껴안은 채.






참고: 조지프 르두, 《The Emotional Brain》(1996) / 파블로프, 고전적 조건화(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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