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소리가 증발했다. 목이 좀 칼칼하다 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목소리가 로그아웃 됐다.
‘아, 또 에어컨 때문인가.’
매 여름마다 에어컨의 건조함 때문에 찾아오는 후두염인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성대 결절이에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성대결절? 뭐? 박효신 콘서트 예매 성공했다는 말보다 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건 가수들만 걸린다는 전설의 병 아니던가.
하도 황당해서 "제가요? 성대결절요?" 하고 되물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네, 본인이요. 성대결절이요.' 하는 표정으로 하얗게 몽울진 내 성대 사진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병원 문을 나서며 깨달았다. 야심 차게 들인 방음 부스에 고음을 찍겠다며 매일 미친놈처럼 날뛴 게 화근이었다는 걸.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고, 무리하면 탈이 난다.
'당분간은 묵언수행 하세요.'
의사의 진지한 조언을 되새기며 그날부터 나는 회사에서 가장 조용한 관종이 되었다. 소통은 손짓과 표정으로 했고, 통하지 않거나 디테일하게 전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휴대폰 메모장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들이밀었다.
곧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내가 조용해지자 멸종 위기 동물이라도 발견한 듯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준 씨, 성대결절이라면서요? 아파요? 말을 못 하네." 라며 커피를 사주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조용하니까 사람이 달라 보여."라며 덕담과 함께 점심을 사주는 사람도 생겼다. 전혀 몰랐다. 침묵의 대가가 이렇게나 훌륭할 줄이야.
진짜 신기했던 일은 그다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내 할 말 하느라 바빴을 회의 시간, 목소리를 잃어버리니 보이지 않던 장면들의 의미가 보였다. 팀장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면서도 몸은 탈출 각을 재고 있는 동료라던가, 영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열심히 리액션하는 후배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그 미묘한 불일치가 그렇게 웃기고 재밌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친구 세 명과 저녁을 먹고 카페에 앉았는데, 말 못 하는 나를 두고 둘이서 열띤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 말은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 흡수해 버리는 거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들이 왜 이렇게 웃기던지! 여러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나니 목소리가 조금씩 돌아왔지만, 더 침묵하고 싶었다. 다시 예전처럼 생각 없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도 했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귀 기울여 듣는 것도 꽤 재미있었달까. 결국 그러다 친한 동료에게 덜미를 잡혔지만 말이다.
"너 목소리 돌아왔잖아. 왜 계속 조용해?"
그렇게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은 예전과 달랐다. 말하기 전에 들었다. 조금만 참고 듣다 보면 즐거워진다는 걸 침묵으로 배웠으니까.
언제까지 이런 먼저 듣기가 가능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용했던 기간 동안 알게 된 사실은 몇 가지 있다. 말은 내가 하는 거지만 소통은 같이 하는 거라는 사실. 혼자 떠들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내 말을 더하는 일이 조금 더 재밌다는 사실까지.
'아 진짜 재밌다! 너 얘기!!'
말하는 법을 잊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