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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라는 이름의 계절 ​

by Kim

“패버린다! 진짜!!”

열여섯의 내가 화면 속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쭉 돋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저런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만큼 참 겁도 없고 스스럼없었구나.

얼마 전 잡동사니로 가득한 학창시절 책상을 정리 하다가 진짜 오래된 폴더폰 하나를 발견 했다. 아, 이거 중3 때쯤 쓰던 거. 이걸 여태 갖고 있었네. 빛바랜 스티커 자국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찡했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해서 혹시 켜지나 싶어 충전기를 찾아 꽂아봤다.

켜진다. 느릿하게. 액정에 불이 들어오는데 촌스러운 배경 화면, 요란한 벨소리… 모든 게 다 그 시절 그대로였다. 피식 웃으면서 버튼 몇 개 눌러보는데 동영상 파일이 몇 개 있었다.

제목도 없고 날짜만 덩그러니 쓰인 파일들. 뭘까? 하나하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옛날 생각나는 영상들이었다. 그러다 하나의 영상 앞에서 나도 모르게 멈췄다. 내 친구 녀석이 찍어준 촌티 가득한 내 얼굴. 앞자리에 앉아 날 찍었던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낄낄거리고 있다. 그러다 내가 친구한테 손사레 치며 외친 거다.

“고만 찍으라고! 패버린다 진짜!”

친구는 뭐가 웃긴지 꺽꺽 대며 또 웃는다.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내가 뱉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으며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물론 지금 들으면 기겁할 말이지만 저런 말을 해대면서도 서로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허물없고 편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그랬다. 예의나 눈치 같은 걸 배우기 전에 마음이 먼저 앞서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가끔 모든 것에 조심스러운 지금보다 저때의 단순함과 에너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게 그 질겁할 어휘들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유다.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그렇다. 철없던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이렇게 복잡미묘하지만 그래도 싫지만은 않다. 더 재미있는 건 지금도 그 녀석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때처럼 된다는 거다. 물론 이제 와서 '패버린다' 같은 말을 하진 않지만, 말투가 유치해지고 장난이 많아진다. 약속 시간에 늦은 녀석한테 "고만 늦으라고! 마!!"라고 투덜대는가 하면, "어, 안들려."하면서 틱틱대기도 한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또 즐겁다. 어른의 예의나 체면 같은 건 잠시 잊고 그냥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 그때처럼 솔직하고 단순해서 기분 좋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 어쩌면 이게 ‘찐행복’ 비슷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그 시절의 서툴고 거침없던 나도 나고 지금 예의와 눈치 속에서 버둥대는 나도 나다. 중요한 건 그 두 모습 사이를 가끔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게 해주는 편안한 친구가 지금도 내 곁에 있다는 거겠지. 폴더폰 속 영상처럼 가끔 꺼내보며 웃을 수 있는 추억, 그리고 현재의 '찐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관계. 참 고맙고 알 수 없어서 더 재미있는 그야말로 ‘시절’이라는 이름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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