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근데 장소가 레이캬비크 3

by 오늘영

양말들의 왕


( 이 글의 제목은 글 쓰는 시점에 런던에서 보았던 뮤지컬 <라이온킹>의 영향을 받았음이 다분함을 밝힙니다. 물론 내용은 라이온킹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아울러 저의 여행 경로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영국 런던 - 프랑스 파리 -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어진다는 점도 미리 알려드려요.)


나는 목이 길어 발목을 충분히 덮는 양말을 좋아한다. 힙함의 한 끗이 양말이라고도 하지만, 나의 복장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여행에서도 한 달 내내 고무줄로 된 검은색 운동복 바지를 입었고, 날씨에 따라 검은색 목티나 맨투맨 티셔츠를 입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여행하면서 산다는 생각으로 캐리어를 텅텅 비워서 떠났지만, 옷은 아이슬란드의 양모 스웨터인 로파페이사 딱 하나를 샀을 뿐이다. 대신 여행지의 양말을 샀다.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무민이 그려진 긴 흰색 양말을 15유로(한화로 약 21,000원)를 주고 구입한 것은 시작으로 씽벨리어 국립공원 앞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슬란드 국기가 그려진 양말을 샀다. 이후 방문한 글래스고 현대미술관(GoMA)에서도 GoMA의 상징인 꼬깔콘을 쓴 동상이 잔뜩 그려진 회색 양말을 구입했고, 바르셀로나의 기념품숍에서는 구엘공원의 상징인 도마뱀이 잔뜩 그려진 파란색 양말을 구입했다.


아이슬란드 여행 중 마지막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친구의 시어머니(아이슬란드에선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가 아이슬란드식 저녁에 초대해 주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일요일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양고기를 먹는 전통이 있다고 했고, 타국에서 온 며느리(!)의 친구인 나에게 아이슬란드식 식탁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며 초대하신 거였다. 세상에! 나도 한국에서 가져온 한옥이 그려진 엽서에 몇 문장을 써 레이캬비크 시내의 카페 Sandholt에서 산 초콜릿을 선물로 들고, 아이슬란드 국기가 그려진 파란색에 빨강과 흰색의 양말을 신은 모습으로 초대에 응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준비한 선물을 드렸다. 할머니는 인사할 때 한 번, 선물을 드릴 때 한번 더 안아주셨다. 시각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따뜻했다. 입구를 지나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협탁 위에 비틀즈 음반이 놓인 것을 보았다. 응접실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식당이 있었고, 식당 가운데 놓인 식탁 주변에는 허리 높이 정도의 갈색 협탁이 있었다. 협탁 위에는 할머니 자녀들의 결혼사진이 놓여있었는데, 내 친구와 그의 남편은 한국 전통혼례 방식의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식탁 주변 벽에는 총 4개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계곡을 그린 것 같았다. 두꺼운 붓질이 마음에 들어 그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식탁 위 한쪽 끝에 촛대 2개가 식탁을 밝혔고, 식기는 총 다섯 개(할머니와 친구네 가족 3명 그리고 내 것)가 놓였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음식 접시를 하나씩 내오셨다. 토마토, 셀러리, 양상추가 가득 든 샐러드와 달콤한 소스로 조린 알감자, 완두콩, 옥수수, 달콤하게 절인 자주색 양배추, 배처럼 하얗게 생긴 피클 같은 것(친구가 이건 박(calabash)과의 채소라고 알려주었다)이 차례대로 놓였다. 양고기 다리가 통째로 구워져서 나올 땐 나도 모르게 ‘와’라고 외쳤다. 양고기는 참치캔의 참치처럼 으스러졌는데 참치보다 훨씬 부드럽고 촉촉했다. 할머니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캐러멜 색의 소스와 잘 어울렸다.

식탁에 앉은 다섯 사람은 아이슬란드어, 영어, 한국어로 제각각의 대화를 했다. 누가 제일 키가 큰지, 누가 제일 나이가 많은지, 오늘 있었던 이야기, 가족 중 누군가의 이름도 언급되고, 식탁에 놓인 촛대도 가리켜졌고, 할머니집의 텔레비전도 언급되었다. 케이티가 신난 모양인지 목청이 점점 커졌다. 내 친구는 ‘정신없다’고 말했다. 나는 양고기와 샐러드를 네 접시 더 먹어치웠고 아이슬란드 라거 맥주인 GULL도 한 잔 마셨다. 내 얼굴에서는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내 친구를 통해 말을 전했다. 나는 통통해진 배를 두드렸다. 식사를 마친 뒤 다섯 사람과 검은 개 하나는 응접실에 앉아 내 아이슬란드 국기모양의 양말을 보며 깔깔거렸다. 케이티는 신이 나서 서 있는 할머니 곁으로 나를 데리고 간 뒤 나의 팔 길이와 할머니의 팔 길이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재보았다. 내 친구는 응접실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었고, 그의 남편은 긴 다리를 뻗어 앉았다.


오후 8시, 헤어지는 인사를 하며 할머니는 나를 한 번 더 안아주셨다. 가로등이 켜 진 길을 따라 수다스러워진 사람들과 함께 친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사이에서 평생 살 것처럼 굴었지만, 나는 내일이면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에게도 각각 엽서를 건넸다. 나의 친구가 케이티를 위해 엽서를 읽어 주었고, 케이티는 그것을 따라 발음했다.


케이티, 건강히 지내고 있어!

케이티, 건강히, 지내고, 있어.


이모를 반갑게 맞이해 주어서 고마웠어.

이모를! 반갑게, 맞이해주어써 고마웠어!


다음에 만나서 같이 또 놀자!

다음에, 만나서, 같이! 또, 놀자!


사랑해!

사!랑해!


그들이 연이어 소리 내 읽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 웃었다.



이후 이어진 여행에서 나는 기념품으로 샀던 양말을 하나씩 꺼내어 신었다. 글래스고에서 무민양말을 신으며 반타공항을 떠올리고, 런던에서 아이슬란드 국기가 그려진 파란 양말을 신었다. 오늘치의 여행이 끝난 뒤에는 양말을 빨래하고 건조기에 돌려 다시 짐 가방에 정리해 넣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그 양말들은 짐 가방 구석에 처박혔다.

파리를 여행할 때 무민양말을 꺼내 신었지만 반타공항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지나간 추억보다 오늘 헤쳐나갈 모험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물관 예약이 제대로 되었는지, 이동 편은 맞는지, 핸드폰 배터리는 충분한지를 점검했고, 나 스스로를 무사히 박물관으로 이동시켜야 했고, 새로운 작품과 조각상을 보는데 나의 모든 관심을 사용했다. 그리고 돌아와 오늘 봤던 그림과 작품을 떠올리며 신었던 무민 양말을 빨래하고 건조기에 돌렸다.


오늘, 조용히 혼자 짐을 정리하다가 내 양말들을 본다. 그 사이 몇 번 더 신고 빨래된 모양인지 벌써 조금 늘어졌다. 이 여행이 모두 끝나면 어떤 마음들을 이 양말에 남게 될까. 뭐,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런 걱정은 넣어두고 내일 또 새로운 양말이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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