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류의 ‘씹는’ 전통은 참으로 유구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행하는 음식을 ‘씹는’ 것에서부터 험담을 늘어놓는 행위, 타인의 말 또는 메시지를 무시하는 행위까지 ‘씹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변주해 왔다. 최근엔 특정 분야를 장악한 사람 또는 활동에 대해 ‘씹어먹었다’라고 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씹는’ 일이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인간의 ‘정신건강 유지’에 있다. 실제 우리의 이가 음식을 ‘씹는’ 동안 소뇌는 자극을 받아 스트레스를 반감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아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씹는’ 행위는 내 안의 화를 잠재우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에 라이벌 원균을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 등으로 풀어헤친 것을 보면 사회적 위치와 성공도 ‘씹는’ 것에서 자유를 주지 못함을 알 수 있다.
30년 넘는 나의 인생에도 ‘씹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데,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을 ‘씹는’ 행위는 가장 오래된 나의 즐거움이다. 오랜 시간 나의 소울푸드였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분식이다. 그 중 떡볶이를 유난히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씹는 맛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밀떡보다는 쌀떡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쌀떡의 쫄깃함을 밀떡이 따라오기 힘들거니와 국물을 머금어 살짝 불어버린 떡이 씹을 때마다 쫄깃하게 나의 이에 붙었다 떨어지는 그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본적 욕구를 해소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의 욕구로 나아가듯 나의 ‘씹는’ 욕구도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뎠는데, 그것은 바로 험담의 ‘씹는’ 행위였다. 오랜 시간 험담 인생을 살아왔던 나는 언젠가부터 살짝 방향을 틀어 변형된 험담의 길로 들어서게 됐는데, 한 번의 충격이 컸다. 보통 험담의 충격은 나의 험담 대상자가 다시 나를 향해 험담을 반사시켰을 때 갖게 되는 데, 나의 경우는 좀 달랐다. 내가 무척이나 믿었던 이에게서 나온 나를 향한 험담, 그것이 돌고 돌아 나에게 꽃혔던 것이다. 아 이토록 나의 어제와 그제를 되돌아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는 일이 내 인생에 얼마나 있었던가, 스스로 자존감을 갉아 지하 바닥을 뚫을 때쯤 오래된 나의 험담 인생의 경로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씹는’ 것의 쾌락을 끊은 건 아니다. 나는 그때부터 우리 선조 이순신 장군을 본받아 맹렬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썼다. 회사에서도,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썼다. 약 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의 일기는 마치 데스노트와도 같다. 일기를 쓸 때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둠의 부캐가 슬금슬금 올라와 정제되지 않은 글자들을 마구 뱉어낸다. 대상도 내용도 범위는 종잡을 수 없다. 유독 너덜너덜한 일기장이 있는데, 그 해는 화가 많은 해로 기록된다.
그 날도 손목이 아플 정도로 일기를 쓰던 무수한 많은 날들 중 하루였다. 문득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일기가 이렇게 후대들에게 다 까발려질지 알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펜의 놀림을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리드미컬한 속도감으로 일기를 써내려갔다. 뭐 내가 후대에 기억될 인물은 아니니, 다만 죽기 직전에 다 불태워버리리라.
최근에는 의식적으로 또 다른 ‘씹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데 바로 다양한 말과 문장을 ‘곱씹는’ 것이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혼자만의 ‘곱씹는’ 시간이다. 언젠가부터 빠르게 휘발되는 콘텐츠보다는 내가 직접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읽는 것인데, 문장을 천천히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 내어 보고,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장을 ‘곱씹다’보면 그 안에서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와 내 주변까지 생각을 다양하게 확장해볼 수 있는 나만의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일기장에 ‘씹어’왔던 나의 일상들이 조금은 누그러짐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감사한 덤이다.
복잡한 세상의 간결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내 인생의 ‘씹는’ 여정은 지속될 것이다. 내 마음만큼이나 위장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인생에서 놓쳐선 안 될원초적 기쁨 중 하나다. 일기를 통해 지난 상황을 복기해보고, 감정과 이성이 교차하는 나의 마음을 글로 표현해보는 것, 그리고 나만의 문장 하나를 곱씹어 보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데 꽤 훌륭한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권한다. 변화도 많고, 상처받을 일도 많은 복잡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씹을 것’을 찾아내시기를. 그 안에서 작은 감사를 발견해내시기를.
당신은 지금 무엇을 ‘씹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