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

일상영웅전 #26

by 원웨이브


손자는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연말 특집이라며, 화면 속 사람들은 한 해를 돌아보고 있었다.

웃고, 정리하고, 무언가를 마무리하는 얼굴들.



손자는 무심코 말했다.


“올해… 나는 참 한 게 없네.”


말은 가볍게 나왔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 말 안에는 스스로를 향한 조심스러운 실망이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잠시 있다가 물었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니?”


손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눈에 띄는 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질문도 이제는 좀 지겨워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그치지도, 바로 답을 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해 볼래?”


손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고작해야 이런 거였는걸요.”


프로젝트 준비를 하며 스터디를 했던 시간,

신입이라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잘한 일들을 맡았던 날들,

그리고 마침내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던 밤.


“아, 그때가 있었네요.”

손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팀원들과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웃던 회식 자리.


누군가는 컵을 들고 소리쳤고, 누군가는 ‘이번엔 진짜 해냈다’며 웃었다.

손자는 그 한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같이 해냈다는 기쁨을 느꼈다.



“그날은요, 집에 가는 길이 되게 가볍더라고요.”

손자는 웃으며 말했다.

“피곤했는데… 이상하게 신났어요.”



해외 워크숍에서 낯선 환경 속 팀을 이끌었던 며칠,


그때 처음으로 ‘괜찮은 리더였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


말을 할수록 장면들이 하나씩 살아났다.



늦은 밤 불 꺼진 사무실,

회의실에서 조심스럽게 냈던 첫 의견,

낯선 도시의 공기와 그 안에서 느꼈던 책임감.




손자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올해, 꽤 많은 걸 했네요.”



할아버지는 그제야 손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안 한 게 아니라,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거야.”



손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렇게 살아온 것도


올해를 잘 살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무언가가 되지 않았어도,


버티고, 배우고, 시도했다면 그건 충분히 산 거다.

그 시간들은 네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니까.”



손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올해, 잘 살아왔구나.’







영웅은 대단한 결과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며

“나는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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