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
우리는 항상 바쁘다. 지금도 바쁘지만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기에 모든 것들을 빨리 해내야 하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급해지고 그렇게 빠르게 보낸 하루가 끝나면 지쳐 곯아떨어진다.
빠르다는 것이 정답인 걸까?
<빨리빨리>는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게'를 뜻하는 부사로, '빠르다'의 어간 '빠르-'에 부사화 접사 '-이'를 결합한 '빨리'가 두 번 쓰인 말이다. 정말 말 자체도 급하고 부산한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빨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택시를 타도 "빨리 가주세요", 커피를 시켜도 "빨리 주세요", 무언가를 배송을 시켜도 "빨리 보내주세요"이다. 한국인 밑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빨리빨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양한 국가들이 한국을 바라볼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지점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속도'이다. 쿠팡이 만든 당일배송은 오전에 물건을 구매하면 그날 저녁에 물건을 받을 수 있는 구조이다. 읽고 싶은 도서를 사이트에서 사면 그날 받아 책을 펼쳐볼 수 있다. 심지어 만들고 싶은 음식이 있어 재료가 필요하다면 저녁에 주문을 해서 새벽에 문 앞으로 받아볼 수 있다. 빠르다는 것은 살면서 정말 편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사함과 함께 미안함도 따라온다. (사실 그러한 당일 배송과 관련된 알바를 해봤기에 그렇게 배송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는가를 겪어봤다..)
가끔 커피자판기를 이용한다. 동전을 넣고 원하는 커피를 누르면 종이컵이 '따락'하고 내려온 뒤 커피가 채워진다. 동전을 넣고 커피자판기에서 커피가 완성되기까지 1분 남짓한 시간인데 이 시간을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커피가 완성되기 전에 종이컵이 나오는 구멍에 먼저 손을 넣고 기다린다. 사실 이 모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손을 넣고 기다리는 모습이 의아했다. 빨리 가야 하고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도 이해되지만 설마 우리에게 1분의 시간도 없을까?
일부 사람들은 빠른 속도를 즐긴다. 스키장의 상급자 코스에서 눈밭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활강하는 모습은 보는 이까지 스릴을 느끼게 만든다. 고속도로에서 빠른 차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타고 더 빠르게 가로질러 가는 모습은 스릴을 넘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속도를 즐기는 사람은 더 빠른 속도에 늘 목마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고 즐기기 위한 활동이 아닌 '일상의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다는 것이다. 기술이 더 발달하고 개선될수록 일상은 편해지지만 그 속도는 나의 발걸음이 아닌 기계의 속도로 맞춰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 몸을 만들지 않아도 버튼만 누르면 누구보다 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시터시에 몰입한다.
- 밀란 쿤테라, <느림>, 민음사, 김병욱 옮김, p8
밀란 쿤테라가 한 이야기처럼 기계에게 우리의 속도를 위임한 채 살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기술이 주는 편안함이라는 마약에 취해 스스로의 속도를 잊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불현듯 스스로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있고 그로 인해 어색함을 느낀다면 자신의 속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걷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