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by 이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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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을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데, 그 이미지는 모호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글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겪어보기 때문이겠고, 그 간접적인 여파가 크기 때문에 우리의 관념이나 사고 속에 전쟁이 자리 잡은 게 아닐까.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가는 미친 통계값 속에서 60만 입시생들을 한 줄 세우는 것을 입시 전쟁이라 일컫는 것을 보면, 우리 일상에서 전쟁이란 경쟁 또는 상쟁으로 통용되는 것 같다. 유한하기 때문에 경쟁이 있고 전쟁이 있을테고, 그 유한함이란 인간에게 있어 어떤 문턱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어떤 의미로는 희생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전쟁을 떠올릴 때면 나는 무엇보다 이 ‘희생’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는다. 내게 있어 전쟁이란, 희생이 큰 부피와 큰 무게를 차지한다. 앞서 얘기했지만, 전쟁을 다룬 많은 글이나 미디어가 있다. 거기서 수 많은 병사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표현되는 것을 보면, 저 병사 한 사람의 인생도 들추어보면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텐데, 라는 느낌이 다가온다. 평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모호하고 물음표 짓게 되는데, 그런 의문에 답은 오히려 고통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른 하나의 이미지는 공포다. 전쟁의 공포는 겪어보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 또한 나를 매우 힘들고 지치게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토요일 오늘, 프랑스 테러 사건 소식을 들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파리 시민들은 자신의 터전에서 하루에 6곳에 동시 테러가 일어난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 공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만약 내가 사는 곳에서 그런 참사가 발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 역사의 크나큰 오점인 세계 대전을 치르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은 전쟁을 감행하고 있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타인의 고통’이라고 할 때에 고통에 방점을 찍으면, 그것은 필경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런 자신의 고통을 어느정도 주조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게되는데, 내 생각에 이것은 매우 원시안적이라고 생각한다. 차가운 지성과 사유를 접목시키기엔 선험적인 판단에 대한 벽은 너무 높다. 그리고 그것이 ‘차갑다’라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의식을 앞세우고 있다. 먼 나라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만연한 여러 사회 문제 - 예를 들면 환경 문제 - 만 봐도 그렇다. 수잔 손택처럼 사라예보에 3년 정도 머물지 않는 한 우리의 시선이 가닿는 위치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나선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감정에 크게 동한다. 이것은 현대의 일이 아니다. 과거 그리스 시대에, 훌륭한 웅변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복돋아주어 전투력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정치에 있어서는 더 확실하고 옳은 말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른바 ‘레토릭’의 탄생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수사의 목표란 ‘지혜로운 인간’과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연설가들이 말로써 많은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것도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열정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메시지의 힘이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보다 훨씬 더 유효하다고 믿는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왕들은 자신의 신민들에게 연민이 없는가?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을 결코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성이니 하는 것을 상기시킬 때에는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다 하는 사실을 먼저 견지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공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늘 미래에 내가 부모가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미래에 부모가 되어, 아이를 낳았을 때, 그때의 공감. 정말이지 그것이 나이차와 세대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보편성과, 또 아버지로써의 나의 성장등을 아우르는 경험이다. 그 아이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 아이의 시선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공감은 그 사람이 되려는 수렴 과정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마셜 맥루언이 말했듯, “미디어는 메시지다.” 그에 따르면 책은 눈의 확장이고, 바퀴는 다리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사진 또한 감각기관 중 눈의 확장일 것이다. 이제 미디어 각각에 대해 그 메시지 자체가 달라지고 수용자가 펴는 인식론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중 사진은 단일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는 대표적인 미디어다. 거기엔 청각도, 후각도 관여되지 않고 시각만이 유일하다. 시각적 세계라는 것은 즉, 생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은 막간이 아닌 행간에 존재하는데, 사진은 그럴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강렬하지만 그만큼 데이기 쉬운 게 사진을 통한 보도라고 생각한다. 사진이 이렇게 범람하는 시대에는 전달 내용과 동시에 그 사진의 ‘매개성’을 파악하는 게 현대인의 과제라고 본다.



2015.11.13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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