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걸그룹 좋아합니다

다시 만난 세계 - 12

by 시그리드

일코 하는 삶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여덕임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덕후들이 덕질을 감추고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을 '일코'라고 한다. 구글에 일코를 치면, '일코 배경화면' 이 연관검색어로 쫙 뜬다. 덕질은 언제나 하고 싶고(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두고 싶고), 드러내기는 싫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거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덕후들만의 방식으로 현실과 타협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덕후들만 알아 볼 수 있는 최애의 사진들을 배경화면으로 해두고 있는데, 일반 사람들이 보면 그냥 인스타 갬성 사진 정도로 믿을만한 사진이다.

최근엔 굿즈에 있어서도 그룹의 로고나 멤버의 이름이 박힌 형태가 아니라, 멤버가 직접 그린 그림이랄지 문구랄지 등으로 꾸민 일코용 굿즈도 많이 판매되고 있다. 좀 씁쓸하지만, 일코 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덕후들의 니즈에 맞춘 기획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 걸그룹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존재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덕질하는 대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즐겨하고 있는 운동이나,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낙이자 자부심인데! 덕후로서의 역사가 쌓여가고, 덕후의 피가 내 몸에 흐르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로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덕밍 아웃이 쉽지 않았다. 동생에게 얘기하기도 힘들었고, 왠지 모르게 평가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는 괜한 우려 때문이었다.

시작은 내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것 같은 덕후들을 공략했다. 아이돌 덕후가 아니어도 상관없었고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얘기해주는 사람에 해당했다. 첫 타자는 회사 선배였다. 슬며시, "저 걸그룹 좋아해요" 얘기로 시작한 첫 덕밍 아웃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쉬웠다. 누군가는 살짝 놀라기도 했지만(눈으로 보이그룹도 아니고 걸그룹? 이라는 말풍선이 뜨는 상황), 대부분 호기심을 가지고 오 누군데? 하고 물어보고 알고 싶어 했다. 그럼 나름 수줍지만 자랑스럽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혹은 무대를 보여주곤 했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보수적인 전 직장에서는 나 자신이 덕후임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남자 친구 여부는 일상적인 질문이었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는지도 물어보는 조직이었다) 새로 이직한 회사는 스타트업이어서인지,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다 소수성을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고, 확실히 주변 사람들에게 덕후임을 밝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외려, 아이돌 덕후들만이 모여 떠드는 슬랙 내 커뮤니티가 있을 정도였고 덕질을 하며 쌓아온 정보들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덕밍 아웃 이후의 삶

실제 현실에서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덕후를, 그것도 최애가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런 기적적인 일도 일어났다. 우연히, 몇 년 전 같이 일했던 파트너사의 대리님이 같은 아이돌 그룹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설마 했더니 최애가 같다고 했다. 랜선으로만 보던 같은 덕후를 만나다니 정말 정말 반가웠다. 평상시에는 일 얘기만 하던 비즈니스 관계였는데, 갑자기 친근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남는 굿즈를 따로 교환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강제적으로 활동을 쉬어야 했던 암흑의 시기 때 서로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뭔가 현실세계에서 같은 아군이 생긴 느낌이라 무척이나 든든했다.


그리고 의외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내 최애는 K-POP 팬들 사이에서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편이어서 최애 이름을 얘기하면 자신도 좋아한다는 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무척이나 뿌듯했다. 또다시 느낀 부모의 마음이었달까.


여덕인게 뭐 어때서

지금도 내가 여덕임을 밝히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여전히 있다. 근데 이제는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몇 년간 덕질을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친구는 자신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무척 신기하다고 한다. 덕질하는 유전자는 타고나는 것 같지만, 각자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 다 큰 어른이 아이돌 좋아하는 게, 여덕인 게 뭐 어때서!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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