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시 만난 세계 - 15

by 시그리드

빛나는 젊음의 대가

아이즈원의 멤버이자, 10년 차 아이돌인 미야와키 사쿠라가 자신의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제는 본인이 원치 않는 것들을 보거나 들었을 때, 이에 대한 감각이 덜해진 자신을 느낀다고. 멘탈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변화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슬픔이든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


사쿠라의 단단한 그 말이 참 슬펐다.


아이돌, 그중에서도 걸그룹은 눈부시게 빛이 나는 젊음을 대가로 꿈을 이루며, 여전히 많은 사회적 편견을 감당하고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매년 아름답고 더 어린 걸그룹이 데뷔하고, 대중은 또 그 젊음을 쫓아간다. (10년간 200개의 걸그룹이 데뷔했다고한다) 극소수의 그룹은 세월이 지나도 살아남아 견고한 팬덤을 유지하지만 대부분의 걸그룹은 7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하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STEP BACK

세상은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갓더비트(GOT the beat)의 데뷔곡 가사를 둘러싼 논란은 그 믿음을 무색하게 했다. 최고의 걸그룹 멤버들로 구성된 유닛인 갓더비트의 노래 Step back의 가사는 원하는 남성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 여성을 폄하하는 '여적여' (여성의 적은 여성) 내용이다.

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정말 참담해지는데, 세상을 바꿔가는 여성들의 진취적인 모습을 다룬 '걸스 온탑'을 자그마치 17년 전에 만들었던 작곡가의 곡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제목대로 퇴보한(뒷걸음치다, Step back) 가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 거에서 손 떼 너 Step back Step back

다시 태어나도 안될걸 Step back Step back

착한 남자들에게 너는 독배 같은 것

마실수록 외로워

He's sick and tired everyday


게다가, 수년간 불법 촬영이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가운데, 아래 가사를 보면 내부적인 모니터링 과정이 없었던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다.


남자들 다 똑같아 내가 뜨면 시선집중

여기저기 Flash 터져

찍어라 찍어라 찍어라


해당 유닛에 속한 멤버들은 여성 팬덤, 즉 여덕이 많은 그룹 출신이다. 이것이 아이돌산업의 혁신을 이끌어온 엔터 회사의 야심 찬 프로젝트의 시작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덕후들은 움직이고 목소리를 낸다. 아무리 사랑하는 최애의 노래라고 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했고 트위터상에서 10k가 넘는 RT가 일어나고 이슈화되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소비하는 덕후들이다.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경험하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그룹의 노래가 인기를 얻고, 상실을 대하는 사려 깊은 태도가 담긴 노래를 내놓은 스물아홉의 아티스트와 여성 간의 사랑을 과감하게 노래에 담은 아티스트(둘 다 모두 여성)가 활동하는 2022년 현재.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걸그룹을 사랑하는 여덕으로서의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나의 최애가 더 좋은 환경에서 차별받지 않고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나설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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