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뜨거운 것일 줄 알았다

뻔한 술 이야기 - 1

by 시그리드

뻔하지 않게 시작해보려고 했는데, 또 뻔한 게 되어버릴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술을 처음으로 마셔본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뜨거웠던 술에 대한 첫 기억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첫 술에 대한 기억은 차례상에 올라왔던 맑은술이었다.

쌀을 발효해서 만든 청주 종류였을 것 같은데, 차례 지내고 남은 술을 서로 권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대체 저건 얼마나 맛있길래 저렇게 양보하고 난리지?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던 것 같다. 한 번만 먹어보고 싶다고, 삼촌 혹은 외숙모에게 부탁했던 것 같고 허락을 받고 기세등등하게 새모이 정도되는 적은 양을 목으로 넘겼는데! 정말 특유의 향이 너무 강하고... 뜨거웠다.

그렇다. 내가 처음으로 마셔본 술은 ‘뜨거움’이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 때 한두 번 친구들과 시험 끝나고 맥주를 마셔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모두가 그러하듯이, 20살 새내기 때부터였다.


술은 정신력이란 말은 누가 만들어서

어른이 되면 술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술은 어른의 자유를 상징하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는 걸 배운 건 신입생 새터에서다.

새터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명씩 노래를 시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속한 사학과는 정말 과하게 열정이 넘치고 융통성 없는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영하의 추운 날씨와는 다르게 쩔쩔 끓었던 숙소에 놓여있던 수십 개의 소주와 맥주병들. 그를 둘러싸고 앉아 끝나지 않고 진행되던 술 게임들.

타고난 박치에 순발력도 없어, 술 게임에 젬병이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수차례 걸렸고, 종이컵에 콸콸 따른 소주를 새우깡과 함께 들이켜야 했다.


게다가 선배들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전통-'술을 받을 때 두 손으로 받지 않을 것' '소주는 무조건 원샷'-을 지켜야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대체 저게 왜 자랑스러운 거지??? 싶고.

하여간 이런 술 권하는 분위기에서 배운 덕에, 학과 외 술자리에서 어르신들에게 한 손으로 술을 받고, 원샷으로 들이붓고 지르는 습관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이십 대 초반 술과 관련된 흑역사는 다 저 술버릇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식도를 마비시키며 속이 뒤집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본격적인 알콜 해독은 처음이라 쌩쌩한 간 덕분인지, 혹은 낯선 곳에서 긴장 때문이었는지 정신은 멀쩡했고, 기억을 잃지도 않았다. 그 후로 한참동안 아주~오만하게도 스스로 술이 센 편이라고 생각했다. 정신력으로 버티면 되는구나 싶었지. (역시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날 아 인간이 이렇게 술 그 자체가 될 수도 있구나, 좀비가 실제로 있다면 이런 것이구나 싶은 광경들을 많이 목격했다. 술이 체질상 잘 받지 않을 수도 있고, 술이 싫을 수도 있고 사람마다 술에 대한 자유가 있는 법인데, 그 2박 3일간의 새터는 그런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사건들이 있은 후로 이젠 새터에서 술을 권유하는 문화는 사라졌다고 들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 앞에서, 술은 가까이하고 즐겨야 할 필수품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어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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