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독을 비울 때까지 : ‘적당히’의 중요성

뻔한 술 이야기 - 2

by 시그리드


술독을 비울 때까지


적당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INFJ로서, 가끔 약속 때문에 바깥에 나가면 그동안 밀렸던 것을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다.

처리하는 일 목록에 빈번하게 들어가는 것은 ‘술 사 오기’인데, 술은 식료품과 달리 단독으로 배달이 안 되는 (거의) 유일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맥주야 동네 편의점에 가서, 편하게 사 오면 되지만 와인과 진이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들은 어딘가를 가야 살 수 있고,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으므로 약속 장소가 가는 동선과 겹치면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증류주들은 보통 남대문에 가서 사는 편이고, 와인은 자양동에 있는 가게를 이용하는 편이다.

물론 와인의 경우는 근처 대형마트를 가기도 하지만, 요새 가장 좋아하는 뉴질랜드산 화이트 와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먼 걸음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들을 알아내고 나서는, 뭔가 제 가격에 주고 사는 게 아까워서 귀찮더라도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오직 술을 사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남대문을 방문하는 목적은 다른 것 없이 오직 ‘술을 사기 위해’였고, 그 김에 근처 명동에 간다던가 하는 것은 선택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정도까지의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친구 집들이가 있어서 가는 길에, 자양동 시장에 있는 와인이 저렴한 가게에 들릴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가지 않았다. (후 나 자신 칭찬해)

일단 날이 추운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분명 사놓으면 먹게 되리라는 것이 안 봐도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요새는 혼자든,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하든 술은 주로 집에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집에서 마시는 술의 문제점은 편안함에 더 취해서,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술이 있으면 ‘술독을 비울 때까지’ 먹게 된다.

먹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아 와인 하나 더 있었는데! 하면서 어느새 새로운 병이 내 앞에 놓여있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하.

그렇게 와인, 진토닉, 감귤 증류주까지 샘플러 먹듯이 먹다가 다음날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동물이라지만, 몇 번의 술독 비우기 사건에서 숙취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부족한 상태’가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술에만 해당되는 영역은 아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적당히’를 넘어서는 과한 것들은 문제가 된다. 어느새 나를 옳아 메고, 갉아먹고,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의 원인은 모두 ‘적당함’을 초과하는 욕심과 기대 때문이었다.

나의 오래된 술친구이자 베프인 T가 과거 정신 못 차리던 나에게 외치던 “친구야 네 디그니티(위엄성, 존엄성 따위)를 지켜!”라는 말이 사실상 세상의 진리였던 것이다.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마지노선을 잘 파악하고 살아가려고 한다.


물론, (특히 술에 대해서는) 이런 깨달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유지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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