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술

뻔한 술 이야기 - 3

by 시그리드


손에 넣은 자유

스무 살부터 시작된 서울살이는 자유를 주었다.

10대 시절에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이었고, 수능은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시험이었다. 학교와 선생님들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삶의 낙오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귀에 새겨지도록 주입했다. 수능의 연습게임 같았던 반복되는 시험은 언제나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성적표는 숫자 몇 개로 기분을 우주로 끌어올리기도 지구 내핵으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분명 수능 외에, 학교 외에도 다른 길이 있고 세계가 있었음에도 그때는 몰랐다. <스트리트 걸스 파이터>의 댄서들같이 10대 때부터 좋아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태도를 가지지 못했다.

나와 같은 모범생 밀레니얼들은 성실한 베이비부머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대학이 삶을 좌우한다고 믿으며 학교와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는 것을 큰 성취로 여기고 10대를 보내왔다. 공부 외의 다른 길?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버틴 것은 성인이 되면, 대학을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스무 살의 자유는 그동안을 참고 견딘 대가라는 생각이 컸고, 손에 넣은 자유를 맘껏 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모범생의 술

그동안 금기되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그중에서도 술은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나의 자취방은 친구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소주를 부어라 마시는 것이 정말 정말 즐거웠다. 대체 술을 마시지 않고 친구를 어떻게 사귀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도 각별한 대학 친구들과의 우정은 취기 어린 수많은 밤 덕분에 견고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술에 대해 집착했을까? 물론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몽롱한 느낌과 쓸데없이 용감해지는 그런 기분 같은 것들이 좋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술이 ‘멋진 스무 살’의 대표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중요한 것은 성적이었고, 성적을 잘 받는 것이 우등생의 기준이었다.

대학에서의 기준은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장학금을 받는 것은 좋다. 그럼에도, 갓 스무 살이 된 1학년이라면 술을 잘 마시고 현재를 잘 즐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쿨한 스무 살의 자세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기초에 그렇게 내키지 않으면서도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과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새벽까지 동기와 선배들과 함께 기억에 남지도 않을 이야기들을 뇌까리면서.

과거에도 모범생이었고, 스무 살이 되어도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세상의 기준-술을 먹고 잘 놀아야 한다는 것에 집착했던 것이 아닐까?


폭풍 같은 1학년이 지나가며, 수많은 흑역사의 밤들을 보낸 후에야 학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그렇다. 또 성적표…)

술을 잘 먹는 것 자체가 꼭 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학교는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후로, 1년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도 내 안의 모범생 속성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물론, 그 뒤로도 술은 잘 마시고 다녔다. 다만, 누군가의 강요나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즐기기 위한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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