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술 이야기 - 5
술은 싫지만, 술자리는 좋다면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못 대지만, 술자리는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 술자리의 열띤 분위기, 높아지는 텐션, 사회적인 위신과 체면을 던져버린 느슨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패키지 같은 술자리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맨 정신인 상태로 술이 주는 망각의 선물을 누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꼭 알코올을 목으로 넘기지 않더라도, 공기로 취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자들이다.
물론 술도 술자리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술 마시는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칵테일 바를 가고는 했다. 칵테일 바에서는 알코올이 거의 들어가지 않거나, '들어간 척' 하는 낮은 농도의 다양한 칵테일들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달짝지근한 칵테일의 맛
스무 살 새내기 시절의 3월은 매일매일이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과 특성상 ‘학회’라는 것을 하고는 매번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소주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보통 소주, 맥주로 취하는 1차, 2차를 거쳐 3차까지 살아남는 경우에는 꼭 특혜를 주듯이 선배들은 자신들만의 단골 가게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자주 갔던 곳은 학교 앞에 작은 칵테일 바였는데, 취한 탓인지 뭔가 몽롱한 느낌을 자아내던 공간이었다. 어두운 내부와 조악하지만 싫지 않았던 그림과 소품들, 습기가 느껴지는 낡은 소파, 꼭 대학로의 전직 연극배우가 운영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칵테일이라는 것을 먹었다. 아마 준벅이었는지 미도리 샤워였는지 테킬라 선라이즈였는지 가장 흔하고 만들기 쉬운 것으로 기억한다. 칵테일이 처음이라는 이야기에 고학번 선배가(그래 봤자 스물셋 남짓이었을 거다) 추천해 주었다. 뭔가, 알록달록하고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돈이 없던 대학생 시절엔 사실, 3천 원으로 가장 빠르게 취할 수 있는 소주를 좋아했는데(맥주는 배부르다고 싫어했음) 간에 기별도 차지 않는다고 괜히 폄하하던 칵테일은 사실 비싸서 못 먹는 술이었다. 점차 나이가 들고 고학번이 되고, 머리가 커지면서 다양한 술의 종류를 알고 먹어보았지만 칵테일 자체가 주는 매력 같은 게 있었다. <킹스맨>에서 젠틀맨의 조건으로 말하던 '마티니'나 <섹스 앤 더시티>에서 뉴요커 언니들이 즐기던 '코즈모폴리턴' 이라든지 영화, 드라마 속에서 묘사된 칵테일은 어른의 상징 같은 것이었달까.
칵테일에 대한 선망과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라는 직업에 대해 흥미가 높아졌던 때에는 조주 기능사라는 국가공인 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필기시험을 덜컥 응시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술과 관련된 자격증이 있다니 왠지 가져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을 거다. 교환학생 준비로 휴학했던 시절에 벼락치기로 치른 필기시험을 통과한 후 실기는 치르지 않은 채로 몇 년이 흘렀다.
나라가 인정한 어설픈 바텐더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가 너무 힘들고 지칠 때 미뤄둔 실기를 끝내고 자격증을 따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아마도 힘들고 어렵기만 한 현재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과거의 즐거운 경험과 '칵테일'을 동일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을 얻고 싶었을지도 모르겠고.
약 4주간의 실기코스를 들었다. 선생님의 지도대로 칵테일을 만들고, 또 자기가 만든 것을 마셔보는 시간이 있어서 수업이 끝난 후에는 기분 좋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40여 개의 레시피를 달달 외우고,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내야 했는데 재미와 즐거움을 찾고자 시작했으나 역시 '시험'은 시험이다 싶었다. 하필 시험 직전에 여러 행사도 많고 바빠서 출퇴근 시간을 쪼개가면서 레시피를 달달 외웠다. 막상 시험 전날에는 부산 출장이 있었고, 저녁에 끝나고 시험장인 대전으로 올라와 실기 시험을 보고, 치르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시험 날에는 당황하면서, 뭘 했는지 모르게 7분이 흘러서 분명 떨어졌을 거라며 확신했었는데 합격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합격 통지를 받은 이후, 바텐더는 되지 못했으나 열심히 술을 만들어 먹으라는 소리로 알아듣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혼술을 할 때든, 친구들을 위해서든 가끔은 칵테일 기구를 꺼내서 어설프게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대고는 한다.
시험을 준비하던 그 땐 어디서 그런 열정이 왔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역시 나는 술에 대해서는 진심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