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와인을 마신다

뻔한 술 이야기 - 6

by 시그리드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는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로 시작하는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싸구려 와인'을 마셔도 행복했던 교환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나의 술 연대기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부터 지금 까지지만, 나의 '술 연대기' 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술들의 서사가 시기별로 자리한다. 예를 들어, 소주는 20대 초반엔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했던 메이저였지만 최근엔 단독으로는 잘 마시지 않는다. 맥주는 어렸을 때는 오히려 배만 부르고 금세 깬다는 이유로 싫어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여느 직장인처럼 퇴근 후 맥주를 피로회복제처럼 들이켜기도 했었다. 와인의 경우는 교환학생을 갔던 23살 무렵부터 먹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 인생에서 와인은 명절 선물세트로 들어오는 귀한 것 혹은 소믈리에처럼 전문가들이 골라줘야 하는 술이라는 인식이 컸다. 그래서인지 와인은 '어려운 술'이라는 편견을 가졌다. 그러다 그 편견을 깨고 인간 바쿠스(?)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 계기는 유럽 교환학생 시절에 있었다.


싸구려 와인을 마신다~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네덜란드는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의 나라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에는 는 하이네켄 박물관도 있고, 어떤 음식점을 가든 하이네켄을 주문할 수 있다. 물론, 하이네켄만 마시는 건 아니고 암스텔이나 그롤쉬라는 다른 네덜란드 맥주부터, 이웃나라인 벨기에의 마튼즈나 스텔라, 호가든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엔 다 처음 보는 맥주들이었는데, 요샌 다 한국에 공식적으로 수입이 되고 있어서 구하기 어렵지 않다. 정작 잘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 맥주는 안 마시고, 한국에서도 익숙한 호가든만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맥주 대장 국가로 불리는 독일의 경우, 지역마다 맥주가 있어서 해당 지역에는 주로 그 맥주만 파는데(한국의 지역 소주와 비슷하다), 네덜란드는 영토 자체가 작아서일까? 지역별 구분은 없었다.


다양한 맥주의 세계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했던 것도 잠시, 조금 적응을 하고 보니 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근데 더 놀라웠던 건 와인의 가격이었는데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온 와인들을 3-4유로 남짓이면 살 수 있었다. 진짜 포도로 만들었을지 의심이 가는 저렴한 1유로짜리 와인도 있었다! 그 당시의 환율로 보았을 때 4-5천 원 수준이었는데, 한국 교환학생 친구들과 "와인이 이렇게나 싸다고?" 촌티를 팍팍 내며, 카트에 담았던 기억이 있다. 사실 4유로가 넘어가면 헉, 비싼데 하면서 말이다.

와인의 맛도 몰랐고, 섬세하고 고급진 조예를 갖출 능력도 생각도 없었던 우리는 온갖 싸구려 와인에 흠뻑 취해 교환학생 기간을 보냈다. 여기서 아니면 또 이렇게 언제 먹겠냐고 서로를 다독이면서. (그 후로부터 수 년뒤, 와인 수입량이 늘어나고 대중화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종종 열리던 파티-여기서 파티는 그냥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술 먹고 밥 먹는 것을 의미함-에는 자기가 먹을 술을 들고 가야 했는데, 마트에서 산 4유로짜리 스페인산 와인과 1유로짜리 까망베르 치즈 그리고 레이 감자칩이면 모든 게 완벽했다.

와인은 몇 잔 마실 때는 도수가 높은 것을 느끼지 못해, 앉은자리에서 어느새 한 병을 비워버리고는 했다. 그래서 여러 흑역사들도 발생했고. 하하... 친구의 기숙사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는 가야겠다 싶어서 만취한 상태로 자전거 드라이브를 했는데, 내가 앞으로 가는 건지 하늘이 앞으로 가는 건지 헷갈렸다. 그러다 고꾸라져 온몸에 멍이 들었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취기(혹은 치기) 어린 행동들을 남발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나 쉽게 와인을 구할 수 있고, 종류나 가격 면에서도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대형마트에서는 맥주 판매량을 추월한 지 오래고, 코로나 이후로는 수입량도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한다. "주류 시장의 판도가 변화했다"는 평가도 있다.


와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는 와인 알못이지만 이제는 약간의 취향은 생겼다. 산도가 좀 있는 맑은 느낌의 화이트 와인이 좋은데, 주로 뉴질랜드나 칠레 같은 신대륙 와인이 좋다. 당도가 높은 모스카토나 포트와인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취향이 생기는 것은 좋지만 한편으로 너무 취향이 확고해져 버리면 다른 쪽으로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와인이든 행복하게 마신 탓에, 다양한 국적과 종류의 와인이 내 피에 흘렀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 자기 주관이 확실한 것과 호기심이 다름을 받아들이는 역치가 높은 것은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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