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뻔한 술 이야기 - 4

by 시그리드


술이 이어준 사이

2030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낸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에는 영혼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친구 3인방이 나온다. 연결고리가 없던 그들을 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술. 술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던 ‘술꾼’ 들은 서로 자석처럼 이끌렸고, 함께 한 10년의 시간 동안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술이 있었다. 이것은 비단 드라마의 일만은 아니다. 술을 즐겨 마시고 좋아하게 되었을 때부터,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 ‘술 한잔 하자’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만나 지금까지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과 친해진 이유는 제각기 다르지만,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는 술을 함께 마시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일 하면서 만난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일 외에도 만나면서 관계를 유지하려면 술 한잔쯤은 따로 마실 수 있어야 했다. 술 약속은 술꾼의 입장에서, 그 사람과는 마음을 열고 알아가고 싶다는 수줍은 속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술을 싫어하거나 잘 즐기지 못하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술을 싫어하면, 최소한 ‘술자리’는 즐겨야 한다는 것이 내 마음속 ‘체크리스트’ 에도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취하고 너도 취하는 동등한 관계. 서로의 몸의 알코올의 농도가 비슷한 속도로 같아지는 사람만이 진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개똥철학 같은 술에 대한 주관이 있었다(고 믿었다).


혹자는 술로 만들어진 인연, 취한 상태로 나눈 이야기들은 이성의 판단을 앗아가므로 진실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적당한 음주는 어느 정도의 텐션과 솔직함을 선사하기 때문에, 술과 함께하는 시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다른 면모를 꺼낼 수 있다. 모두가 아는 ‘사회적인 인간 A’가 아니라 ‘평소엔 드러내지 않는 인간 B’를 보여줄 수 있고, 그것을 공유한 상대라면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히려 술을 통해 ‘인간’ 임을 잃어버리고 ‘짐승’을 봉인 해제하는 경우라면 도망쳐야 한다. :)


술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20대의 가열찬 술자리들을 지나고, 이제는 서로의 내일-예를 들어, 다음날 지옥철과 릴레이 회의, 미팅부터 내 소중한 모닝 루틴, 필라테스 선생님과의 약속(사실상 안 가면 나만 손해인 혼자만의 약속)-을 위해 웬만하면 ‘적당히’를 지키는 요즈음. 술자리 자체도 줄어들고, 술 없는 알코올 프리 만남이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술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분명, 인생에 술이 없던 때에는 술이 없어도 너와 나의 우정 혹은 애정의 깊이가 단단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술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소중한 인연들을 돌이켜 보자면, 우리는 술 때문에 친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밤을 지새우면서 함께 한 시간이, 뭘 먹어도 네가 있어 마냥 좋았던 그 순간이,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했던 이야기들이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준 것이다.

술이 있어서 친해진 게 아니라, 술은 하나의 쉬운 핑곗거리이자 수단이었을 뿐.

결국 우리가 있었다.


+술을 태생적으로 즐기지 못하는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친구들과 친해질 기회를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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