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쓰리 빌보드> 로부터
오프닝부터, 왠지 이 영화를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영화들이 있다.
딸을 잃은 중년의 여성 밀드레드는 지지부진한 수사를 비판하는 광고판을 세우고자, 광고회사에 찾아간다.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 없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광고회사의 사장인 레드 웰비에게 돈을 건넨다.
그 때 카메라는 보란듯이, 창문가에 엎어져서 발버둥치는 벌레를 잡는데 밀드레드는 아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벌레를 일으켜 세워준다. 그 짧은 쇼트에서 영화는 밀드레드의 성격을 한 번에 다 묘사한다.
누구보다도 강해보이는 밀드레지만,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이 장면에서 나는 울컥해버렸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캐릭터인 밀드레드를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말을 해봐야 입만 아플 정도로 그 어떤 말로도 부족한 연기를 펼친다. 서부영화의 카우보이처럼 고독하지만 외로움은 모를 것 같은 그녀가 딸의 헌신과 같은 사슴을 보며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가슴이 철렁할 수 밖에 없다. 그 감정의 진폭이 너무도 깊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움푹패인 뺨, 그 뺨을 타고 보이는 목울대까지 그의 고귀한 연기를 보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포용특약(Inclusion rider) 이라고 소리높여 외친 배우의 위엄이란 그녀가 아니면 누가 밀드레드를 연기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하고.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존재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악독한 서장인줄 알았던 윌러비와 소수자들을 혐오하는 편견덩어리 딕슨의 캐릭터는 전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분명 일반적인 구도를 생각한다면, 무능한 경찰 vs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 접근하여 사회비판적인 영화가 될 것이리라.
그러나 윌러비는 존경을 받는 서장이며, 불치병에 걸렸으며 밀드레드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 오히려 영화는 윌러비와 밀드레드의 갈등이 아니라 광고판으로 인한 전혀 상관 없는 주민들의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들이 밀드레드를 방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도와주는 자도 존재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그냥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없다.
밀드레드가 행하는 방식을 모두 훌륭하다 칭찬할 수는 없지만, 그 처절함과 처연함에 공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사랑하게 되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어떤 계기로(사랑이든 무엇이든) 주인공이 성장하고 변화를 겪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변화의 주체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에서 주인공 밀드레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된 캐릭터에 가깝다. 강인하고, 목표가 뚜렷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의 용기있고 확고한 태도는 주변인들을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하는데, 특히 딕슨이라는 캐릭터가 그러하다.
인종차별주의자에, 동성애혐오자인 남부의 전형적인 '백인 남성' 을 상징하는 딕슨은 자기 감정을 주체못하는 폭력적인 경찰이다. 그러나 영화는 월러비 서장의 죽음을 겪고, 밀드레드의 상황에 이입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증오를 누르고 윌리버의 진정한 복수를 위해 범인을 잡고자하는 형사로 거듭난다. 아무리 괴롭혀도 일어나는 밀드레드를 보고, 화상을 입고, 자신이 때린 레드 웰비가 자신을 위해 오렌지주스를 나눠주는 것을 보면서, 사랑하는 이를 잃고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약자가 되면서.
마지막에 이르면 밀드레드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녀를 위한 결정적인 제안을 하기도한다. 이 점이 강자의 위치에 있던 백인 남성인 딕슨을 변화하는 캐릭터로 설정한 지점일 것이다.
<쓰리 빌보드>의 캐릭터들은 수많은 결을 가졌는데,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도 컸다.
샘 록웰과 프란시스 맥도먼드, 우디 해럴슨 의 아름다운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