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예술가가 되기까지
[Intro ; 흑백요리사 소개]
기존 서바이벌 대비 차별점과 등장 셰프들
흑백요리사를 너무나 재밌게 보고 있다. 1~4화를 단숨에 봤고, 5화를 기다리고 있다. 넷플릭스 예능답게 스케일이 화려하고 빠방하지만, 또 반대로 넷플릭스 예능답지 않게 꽤나 공평하고 의외로 차분하다고 느껴진다. 기획과 제작에 신경을 많이 쓴 모양새다.
스포를 하긴 그렇지만 기본적 틀만 간단히 설명하면 흑백요리사는 조금은 생소한 흑백 대결 구도를 가져간다. 이미 요식업계에서 어느 정도 정평이 난 백수저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분한 실력을 갖춘 재야의 고수 격인 흑수저들의 승부이다.
백수저 셰프 중에는 심사위원 자리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탁월한 경력을 가진 쟁쟁한 이름들이 있다. 여러 방송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파인다이닝계 스타 셰프 최현석과 오세득, 마셰코 시즌2 우승자이자 각종 짤과 밈 부자인 최강록 셰프, 마셰코 시즌1 우승자로 잘 알려진 김승민 셰프, 세계적 요리 대회에서 국제 심사를 맡고 있다는 중식계 대부 여경래 셰프, 한국 중식 최초의 여성 스타 셰프 정지선, 한식대첩 시즌2 우승자 이영숙 셰프, 미국 백악관에서 VIP의 식사 대접을 맡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애드워드 리 셰프 등이다.
흑수저 셰프도 만만치 않다. 일단 총 참가자 80명 중에 첫 번째 라운드에서만 20명이 추려진다. 25%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리 잡은 20명의 셰프들 가운데에는 요즘 뜨는 힙한 다이닝의 오너 셰프들도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타이틀을 보고 인상 깊었던 분들은 을지로 보석의 오너 셰프인 장사천재 조사장, 한남 부토의 셀럽의 셰프인데 두 가게 모두 내가 가려고 예전부터 찜해놓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ㅎㅎ
내가 생각하는 백수저 셰프의 공통점?
상상 너머의 요리를 창조해 내다.
서론은 이쯤 하고. 내가 발견한 흑수저, 백수저 셰프들의 특징과 그 둘의 결정적 차이를 말해보려고 한다.
흑수저 셰프들의 경력은 평균적으로 10년 차쯤, 백수저 셰프들은 20년 이상, 많게는 30년 이상도 가는 걸로 보였다. 아마도 피나는 노력의 시간을 10년쯤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을 흑수저 셰프들. 그들은 맛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억울할 지경의 실력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분야에서 10년쯤 매진하여 전문가라고 불리는 위치에 서게 되면, 맛을 내는 것은 기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20년 이상의 세월, 그러니까 흑수저 셰프가 가진 10년 경험의 두세 배 정도 경력에 다다르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생각이긴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흑수저 셰프가 맛있어 보이는 걸 맛있게 잘한다면 백수저 셰프는 '저게 과연 맛있을까?' 하는 것을 '우와 맛있다니!' 하게 만드는 사람 같았다. 그들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넘어, 새로운 미식 경험을 선사하는 혁신적인 요리를 선보였다.
<여기서부터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묵은지가 샐러드로 탄생하다.
에드워드 리 vs. 고기깡패 묵은지 대결
에드워드 리와 고기깡패의 대결이 인상 깊었다. 묵은지라는 랜덤하게 주어진 주재료를 가지고 풀어낸 두 셰프의 해석에서, 위에서 말한 경험과 연륜에 의한 차이가 느껴졌다.
고기깡패의 묵은지 삼합은 상상이 되면서도 무척이나 맛있을 것 같은, 보기만 해도 침 고이는 요리였다. 묵은지 삼합이라는 메뉴 자체는 평이할 수 있지만, 묵은지는 볶고 홍어는 굽고 말아 내는 방식을 통해 고기깡패만의 노하우를 붙여 신선함을 더했다. 게다가 엄청 맛있게 해냈기에, 틀림없이 훌륭한 디쉬를 뽑아냈다.
그런데 에드워드 리 셰프의 해석이 대박이었다. 묵은지의 프레시하고 새콤한 속성에서 콜드 샐러드를 연결시켜 기가 막힌 묵은지 샐러드를 뽑아냈다. 한국인이라면 상상 불가인 묵은지와 단감의 조화로, 지금 글을 쓰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을 창출해 냈다. 게다가 묵은지 주스라니... 쉽사리 상상해 본 적 없는 아이디어였다.
시래기의 화려한 변신 feat. 바쓰
정지선 셰프 vs. 중식여신 시래기 대결
두 번째 대결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에게 와우를 안겨줬다.
중식여신의 시래기 도미탕은 왠지 상상이 가는 그런 메뉴였다. 시래기의 시큼함에 도미의 뼈로 육수를 낸 진~한 국물이 더해지다니, 비주얼부터 대박이고 맛있다면 더 대박일 것 같은 그런 요리였다. 그리고 중식여신은 역시나 맛있게 해냈다.
그러나, 그 이상에 정지선 셰프가 있었다. 시래기와 맛탕이라니. 상상이 불가한 조합이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둘이기에 식감이나 맛도 상상이 덜 가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역시나 여기에도 크리에이티브가 있었다.
실력과 기본기에 연륜이 더해질 때,
전문가에서 예술가의 경지로.
10년의 세월에 준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 분야에 대해서 깊은 노하우가 쌓이고 실수 없는 실력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그 곱절 이상의 시간이 더해지면, 그 시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서 시야가 확장된다. 그렇게 확장된 시야는 어떠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문제를 갈갈이 해체한 후 본질만 뽑아내게 하는 것 같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연륜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다채로움을 붙여 크리에이티브를 완성해 낸다. 그렇게 전문가에서 예술가의 경지로 이어진다.
그게 전문가 이상의, 흑백요리사에서 백수저 셰프들이 가진 무시할 수 없는 연륜의 힘이다.
앞으로 이어질 백수저 셰프들의 기막힌 해석들, 그것을 뛰어넘을 흑수저 셰프들의 반란이 기대된다.
그러면서 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10년 차인 나는, 어떤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