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밟던 시대와 전자기기와 함께하는 시대
그럴 때쯤 나타난 행복원은 SNS였다.
다행히도 세상은 공평한지, 국민들의 우울이 치솟은 만큼
새로운 자극원이 나타나 스트레스 해소원이 되어주었다.
여러 종류의 SNS 소통 도구가 발달하면서
결집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교류할 수 있었고,
서슴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타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겐 사회성을 길러주는 도구가 되었고,
누구에겐 단순한 심심풀이 도구였으며,
누구에겐 세상과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기도 했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흐름을 분석하기 위한 통계 자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SNS가 가진 영향력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할은
비로소 교육으로 억눌려왔던 '개성'을 펼칠 장소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즐겁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나만의 상상을
누군가는 행동으로 옮기고, 사람들과 공유한다.
그리고 모두가 형체 없는 한 장소에 모여 웃고 떠들며 공감한다.
내가 자라오던 세상은 작았다고, 어쩌면 대학만 좇던 그 세상은 틀렸다고 느끼며 SNS를 사랑하게 된다.
우울함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해 줄 SNS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자극의 기준은 점점 높아진다.
억눌렸던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행동을 하고,
더 짜릿한 글과 영상을 갈망하며 자극적인 사람들과 자극적인 대화를 찾는다.
그리곤 쉽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흙길'을 걸어보지 않은 여린 자아들이기에 상처에 깨지기 쉽다.
상처는 2차 스트레스를 불러오고, 익명의 공간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또다시 방어를 위한 발언을 던진다.
'공격적'인 '혐오'의 말들을 서슴없이 던진다.
결국, 혐오의 단어가 곧 놀잇감과 즐거움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자신을 울린 말이 곧 즐거운 말이 되는 아이러니한 사회.
그렇게 탄생한 말들 중 하나가 '~충' 같은 표현이다.
더 이상 도덕적 옳고 그름의 경계는 흐려졌고,
우리 사회는 사랑이 사라진 혐오로 뒤덮여 가고 있다.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사회와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회를 우리가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도 책임감을 갖지 못한다면, 사회는 그들에게 법으로서 책임을 묻는다.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책임감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사회의 논리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스마트폰 시대의 서막이 열렸고, 이제 그 아이들이 막 어른이 되기 시작했다.
소통의 호기심과 즐거움에서 시작된 소셜 플랫폼은
더 이상 소통의 역할만을 갖지 않는다.
지나친 자극은 과시와 허위, 가짜뉴스 생성원으로 변질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겪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아이들과,
그렇게 자라고 있는 온실 속 아이들은 이 양면성 속에서
옳고 그름,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란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비교'와 '시기'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이는 자존감의 하락으로 이어지며 우울한 사람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쉽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정에도 쉽게 흔들리고 기분에 휘둘리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우리는 결국 또다시 원인을 사회로 돌린다.
과거의 아이들이 만든 사회 탓이 맞기에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회 탓만 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미래 아이들의 '탓'을 만든 사회인으로 거듭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이탈하는 순간,
나는 어른들이 말한 그 '실패'의 길로 접어들고 '성공'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원인을 외부로 돌리며 정당화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