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오후, 나는 잊고 있던 나를 만났다
「열여덟 번째 정오」
햇살은 때때로 너무 조용해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 더 깊이 스며든다. 마치 오래된 커튼 뒤에 숨어 있던 먼지처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기억의 틈을 열어, 따뜻한 빛 한 줄기로 그 안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특별할 것 없는 평일 오후, 식탁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나는 잠시 멈췄다. 햇살이 컵을 통과해 바닥에 번지는 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가슴 어딘가가 울컥했다. 마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오래전부터 묵혀온 감정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사소한 장면 하나에 마음이 젖는 날이 있다.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과 닮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의 마루에 앉아 있던 오후들. 사각거리는 바람, 달그락거리는 부엌 소리, 그리고 언제나 나를 감싸던 햇살. 말은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다. 말보다 더 따뜻한 숨결로 다가오던 사랑.
잊고 살았다. 그런 시간들을, 그런 감정을. 우리는 너무 자주 무뎌지고, 너무 쉽게 바빠진다. 눈앞의 일과를 쫓느라 마음의 풍경을 등진 채 살아간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 한켠이 바싹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감정을 접은 채 하루를 넘기고, 마음을 숨긴 채 한 달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색을 지녔는지도 잊는다.
하지만 햇살은, 때때로 아무 예고 없이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따뜻함이라는 건 손으로 잡히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란 걸 가르쳐준다. 그것은 기억의 조각을 흔들고, 마음의 먼지를 턴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남겨진 편지를 다시 읽는 순간처럼.
나는 그날, 물컵 너머로 떨어지는 빛을 보며 오래된 나를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여리고, 훨씬 느렸던 나. 그 아이가 내게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 따뜻한 날도 있잖아. 너는 아직 괜찮은 사람이야.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장면이, 내겐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순간을 품고 있다. 스스로도 잊고 있던 따뜻한 장면 하나쯤은, 마음 안에 늘 숨어 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아주 분명한 무언가로 남는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자. 햇살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날 이후, 나는 가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바라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건 일종의 기도이기도 하고, 오래된 사랑에 대한 인사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것들에게, 이제는 멀어진 마음에게, 조용히 손을 흔드는 일.
그렇게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오후에,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주 오래된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