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쁜 세상에서 한 걸음 늦게, 나를 다시 만나다
「열아홉 번째 정오」
어느 날은, 세상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것 같았다.
가로수도, 행인도, 시간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뛰었고, 숨이 찼고, 그러다 멈춰 섰다.
멈춘 곳은 아무도 없는 공원이었다.
늦은 오후였고, 노을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늘 잃어버렸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야 할 '속도의 권리'였다는 것을.
나는 예전의 나를 생각했다.
사람들보다 느리게 말하고,
노트의 여백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하던 아이.
구름의 속도에 맞춰 걷던 시절.
그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적어도 나를 잃진 않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빨리 대답해야 칭찬을 받고,
빨리 결정해야 인정받고,
빨리 성장해야 사랑받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나를 버렸고,
대신 타인의 기대를 품고 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달려도 도착하는 곳은 늘 '공허'였다.
하루는 아무 약속도 없이 비워낸 날이었다.
휴대폰도 꺼두고, 시계도 보지 않고,
그저 무작정 길을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 어딘가가 따뜻해졌다.
작은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이름 모를 풀꽃.
그 순간 문득, 꽃잎에 맺힌 이슬처럼
내 눈에도 조용히 눈물이 맺혔다.
아,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세상에 맞추느라, 내 마음 하나 들여다보지 못했구나.
나는 조금씩 천천히 살아보기로 했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아침,
일을 하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잠깐 쉬는 오후,
모든 걸 미루고 커피 한 잔을 온전히 음미하는 저녁.
그리고 매일 밤, 거울 앞에 선 채
“오늘의 너는 어땠어?” 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날은 울고,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그냥 침묵했지만
그 모든 대답 속에 진짜 내가 있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면 늦는 거 아니야?”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늦어도 괜찮아.
나는 지금, 나에게 도착 중이니까.”
삶은 경주가 아니다.
때로는 멈추는 용기가,
우리를 가장 먼 곳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있다.
한 걸음 늦게라도,
그 아이를 다시 만나주자.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조용한 밤에,
그 아이가 내 손을 잡아주며 속삭일 것이다.
"고마워. 나를 잊지 않고 돌아와줘서."
그 말 한마디면,
나는 이 여정이 결코 늦은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천천히 와도 괜찮아"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마음속에 적어본다.
'나는, 나에게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