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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말하지 않아 생긴 균열은,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나를 울렸다

by 온기

「스무 번째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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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이 찔리는 칼날은, 내게 가장 가까이 있던 손끝에서 나왔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입술에서,
늘 내 편이 돼줄 것 같았던 눈빛에서.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법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낯선 이의 무심함이나, 지나가는 말 한마디는 며칠 안에 잊혀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의 한숨 하나,
의미 없이 던진 말 한 줄이
몇 년이 지나도 내 가슴 어딘가를 찌른 채 남아있다.




그날도 그랬다.
식탁에 반찬이 조용히 놓이고, 국물 위로 김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그 따뜻한 순간에,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말투로 건네온 한마디가 있었다.
"괜찮지, 너라면 잘할 거야."


말은 부드러웠고, 웃음도 따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웃었지만, 그 속에 스며든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이 내게 닿는 순간, 따뜻함과 함께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아무런 요구도 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안엔 내가 모르게 품어온 기대와 조심스러운 바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잘할 거라고 믿고 있는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때로는 조심스러운 짐이 되기도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밤, 방 안은 조용했지만 마음 한 귀퉁이는 오래도록 울리고 있었다.




또 다른 날이었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게 도착한 내가, 숨차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 친구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말했다.
"이럴 거면 그냥 오지 마."


그 말이 너무 날카로워서 나는 웃으며 넘겼지만,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조용히 불을 끈 채 눈을 감았다.
친구가 나를 기다렸다는 것도, 서운했다는 것도 알지만,
그 말이 내 마음을 너무 쉽게 부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갔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도,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나는 가까운 사람을 더 많이 들여다본다.
그들의 기분, 말투, 눈동자의 움직임,
심지어 오늘 밥을 얼마나 먹었는지까지.


그런데 정작 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그들이 상처받을까봐.
실망했다고 말하면, 그들이 나를 버릴까봐.
그들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는 걸 말하면, 너무 나약해 보일까봐.


그래서 웃고 넘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 안쪽이 천천히 스며들 듯 젖어든다.
말없이 흐르는 감정이 가슴을 두드리고,
그 조용한 울음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맴돌았다.




하루는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가까운 사람은 너를 아프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웃었다.
"그래서 더 아픈 거야. 아프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아프니까."


그 말에 친구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 사람도 네가 아팠던 걸 몰랐을 거야. 우리, 이제 말하자.
상처가 났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그래.
가까운 사람에게 더 상처받는 이유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기대가 되고,
기대가 깨졌을 때, 내 마음도 함께 부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고 싶다.
"나는 그때 아팠어."
"그 눈빛이, 그 말이, 나를 무너뜨렸어."
"하지만 그만큼 너를 사랑했어."


말이라는 건 때로 너무 늦게 도착한다.
마음이 식은 뒤에야, 아니면 이미 관계가 무너진 뒤에야.
하지만 어쩌면 그 늦은 말조차도, 어딘가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은 그대로 남아도, 그 기억을 껴안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으니까.

이제는 조금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사랑하고 싶다.
다시 상처받을지라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고 말할 수 있기를.
그게 우리가 서로를 꿰매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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