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먼저 안아줘야 할 것이 있다는
「스물한 번째 정오」
서둘러야 할 건 따로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먼저 안아줘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서둘러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전철이 떠나고 나서야 문득, 손끝에 무언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바삐 걷던 출근길이었다. 핸드폰 속 진동들, 회의 시작 전 초조한 커피 한 모금, 누군가의 어깨에 닿고 이내 잊히는 발걸음들. 그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흘렸다.
그게 사람이었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아니, 걸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 침묵을 나는 고요라 여겼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단절이었다.
그리움은 물처럼 고여 썩기도 하고, 침묵은 벽처럼 자라나기도 한다.
“지금은 좀 바빠서, 이따 다시 걸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주 끊었다. 그리고 다시 걸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나를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햇살이 창가를 흘러내리던 오후였다.
문득 마주친 얼굴. 오래전 함께 웃던 친구였다.
서로 눈을 마주쳤고, 아주 조심스럽게 외면했다.
"연락할게."라는 말은 너무 많은 계절을 건너왔다.
우리는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저 한 문장이면 되는 것인데.
그 문장은 미루다 보면 자꾸 더 먼 언어가 된다.
카페 창밖에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고요한 틈에는 오래된 시간과 기다림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나눈 커피는 온기보단 기억에 가까웠다.
우리는 늘 ‘언젠가’를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언젠가’가 오늘일 수도, 어제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늘 바쁘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목표를 정하고, 다음 주 일정을 미리 걱정한다.
그 모든 것들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은
늘 “잠깐만”, “조금 있다가”, “다음에”로 미뤄진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서둘러야 했던 건 회의가 아니라, 한 번 더 웃어주는 일이었다.
일보다 손을 잡아주는 일, 말보다 같이 걸어주는 일이었다.
길을 걷다가, 벚꽃잎 하나가 내 손바닥에 떨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잎이 아주 천천히 시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시간이 말을 걸었다.
“나는 언제나 그대로였는데, 네가 늦은 거야.”
“왜 이제야 왔니.”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이제는 안다.
서둘러야 할 건 사람이었고, 기다릴 수 없는 건 마음이었다는 것을.
천천히, 그러나 잊지 않고.
가장 늦기 전에.
손을 내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