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청소 현장 견적, 중고 음향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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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월의 중순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주말 일찍 집을 나서며, 한편으로는 이 프로젝트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는 한동안 우울증으로 주말이면 20시간씩 기절하듯 침대에 누워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사적으로 누군가를, 나를 돕기 위해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것은 오랜만의 경험이었어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1시간 넘는 거리를 대중교통으로도 걸을 힘이 없어서 택시를 잡았습니다.
출발할 때에는 집에서 니퍼 따위의 공구를 준비했습니다.
아버지의 취미 때문에 갖혀있는 물품들 때문이었는데요. 아버지는 공구를 가지고 본인 맘에 드는 물건으로 개조하거나, 누군가 쉽게 만질 수 없도록 철사와 철근으로 꽁꽁 수납장 따위를 묶어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던 분이었거든요. 어지간히 본인을,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분은 아니었을까요.
이른 오전 시간에 온 쓰레기집 앞은 상당히 쾌청했습니다. 당시는 그저 탈출하고 싶던 지옥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다니. 전에는 들리지도 않던 새들의 지저귐이 상당히 즐거웠습니다.
후 - 쉼호흡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흔줄 되던 분이 어찌나 견고하게 철사를 묶어놨던지 니퍼로 한참 씨름을 했습니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소정의 수확이 있었어요.
(* 지금부터 나올 사진들은 제가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던 사진들입니다. 브런치 글과 결이 좀 다른 말투가 있는 점 양해해주세요.)
이윽고 특수청소 업체의 담당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입이 딱 벌어집니다. 조용히 한참을 지하실까지 둘러보며 사진을 찍으시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 족히 10톤은 될 것 같아요.
최소 X백만원은 생각하셔야겠는데요.
지금 짐이 다 보이지 않는데
안쪽에 더 있다고 치면
진행하면서 초과될 수도 있겠어요.
팀장님과 정확한 견적 산출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짐이 많은 곳은
처음 보네요.
내심 어제 챗GPT와 논의했던 최소 견적보다 저렴하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 였습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견적보다는 적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잠시 구석에 쪼그려 누웠습니다. 점심시간이지만 어디서 밥을 먹기도 참 곤란한 곳. 밥맛도 없고, 얼마 없던 에너지가 소진된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퀘퀘한 냄새 속에서 고장난 인터폰이 "치직~ 치직~" 울립니다. 어릴 땐 공포의 집이었는데 어쩐지 아늑하고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그리고 이웃들이 고통 속에 있던 집이었나 생각해봅니다. 집은 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누구도 이해 못할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아왔던 아버지는 어떤 맘이었을까요. 자꾸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애써봅니다.
오후가 되자 중고 음향기기 매입업체 사장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시더니 신기해하십니다.
햐. 이거 옛날에 있던
90년대 비디오 장비인데.
엥? 이건 노래방 기기네요.
이건 외부 행사용 야외 스피커고...
와, 이것도.
이건 또 뭐야. (뒤적뒤적)
이 쓰레기집에 참 별 게 다 있죠? (앞으로도 계속 더 나옵니다. 기대해주세요.)
온갖 전자기기를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사장님 취향이 아버지랑 조금은 비슷하셨던 모양입니다. 넋을 잃고 둘러보시더니, 다시 맘을 잡고 매입 가능한 중고 음향기기들을 골라내시고 견적을 알려주셨습니다.
다행이 백만원 조금 넘게 당장 쳐줄 수 있다 하십니다.
혹시 몰라 차를 가지고 왔어요.
괜찮다면 지금 음향기기를 빼낼게요.
생각보다 반출할 음향기기가 많고, 다니기도 쉽지 않은 곳이라 제가 좀 거들었습니다.
사장님과 둘이 거미줄을 해치고 다니면서 낑낑대고 간만에 몸을 썼습니다. 에어컨도 되지 않고, 창문도 아직 열 수 없는 곳이라 땀도 오랜만에 죽죽 흘렸어요. 어쩐지 무기력도 좀 씻겨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사장님과 중간중간 쉬어가며 담소도 좀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혼자 하고 있는 거에요?
특수청소 할 때 꼭 현장에서 지켜봐요.
소중한 물건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래요.
그리고 이런 기기들 보관할 땐
꼭 제습기를 같이 두세요.
오래되면 겉보기에 멀쩡해보여도
기기들 안쪽에 녹이 슬거든.
그럼 쓸모가 없어져.
이렇게 걱정해주시다니. 참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찌저찌 중고 음향기기를 실었는데 기기가 너무 많아 차에 공간이 모자랐습니다. 특수청소 일정이 잡히면, 첫날에 한번 더 남은 스피커를 빼내기로 하시고 사장님은 길을 떠났습니다.
저도 집에 가져갈 양주들을 마저 담아보았습니다.
본 적도 없는 희안한 양주가 있었습니다. 찾아보니 원래 발매된 붉은 빛과는 다르게 지금은 아주 시커멓게 바란 양주였어요. 8-90년대 무학주조에서 발매된 칵테일용 선라이즈 3종 중 하나입니다.
당시의 한국은 칵테일 시장이 성장하던 때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프랑스 대형 회사, 마리 브리자드와 함께 생산했다던 <선라이즈 슬로진>. 아쉽게도 곧 단종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흥미로운 90년대 유물(?)들이 더 발굴될 것 같다는 기대감 내지는 즐거움. 그래도 꽤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이 쓰레기집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