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을 쓰다듬는 어른의 기쁨
조카가 이제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닌다. 명절 때 그들을 만나면 각자 삶을 살아가는 어른으로 서 있다. 예전과는 다른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들은 더 이상 내 손을 잡고 뛰어다니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자기 삶을 살아간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흐뭇하다.
신기한 건,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릴 때 모습이 오버랩된다는 점이다. 막내가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침대에 누워 있던 갓난아이 얼굴이 겹쳐진다. 까만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 아이. 아직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던 그 아이가 지금 저렇게 말을 하고 웃는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둘째는 여전히 활발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목소리가 크고, 손짓이 크고, 웃음소리가 크다. 그 모습을 보면 마당을 뛰어다니던 아이가 떠오른다. 늘 활발하게 뛰놀고, 자주 웃고,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던 아이. 그 성격 그대로 자랐구나 싶다. 어릴 때 보이던 그 기질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변한 건 키와 얼굴이고, 변하지 않은 건 그 사람 본질이다.
첫째는 나의 첫 조카였다. 자주 놀아 주었다. 업고, 안고, 공놀이하고, 그림책 읽어주던 아이. 그 아이가 이제 나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신다. 직장 이야기를 하고, 결혼 생활 이야기를 한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묘한 기분이 든다. 저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저 아이에게도 이런 고민이 있구나. 그러면서도 가끔, 내 품에 안겨 잠들던 그 아이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 어떤 시점 모습과 어른으로서 모습. 이 둘이 겹쳐지는 순간이 참 신기하다. 이게 내가 나이 듦으로써 경험하는 또 다른 감정일 것이다. 조카들은 모른다. 내가 그들을 볼 때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인다는 걸. 갓난아이였던 아이가, 뛰어다니던 아이가, 내 손을 잡던 아이가 지금 저기 어른으로 서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이건 나이 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각이다. 경험이다. 조카들은 자신이 어릴 때 어땠는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들이 어떻게 울었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어떤 장난을 쳤는지. 그 기억이 지금 그들과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이 감정. 이건 오직 나만 가진 시각. 오직 나만 느끼는 이 감각.
나는 이 느낌이 참 좋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사람이 자란다는 것,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이 모든 게 선물 같다. 조카들은 각자 삶을 살아가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시간의 결을 느낀다. 어릴 때와 지금이 함께 존재하는 이 순간. 겹쳐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이 드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처음을 알고, 지금을 보고, 그 둘을 동시에 느끼는 것.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된다. 거실 한편에 앉아, 시끄럽게 웃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만 아는 옛날을 혼자 품고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충분한 것 같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처음'과 '지금'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고유한 시각을 얻는 일입니다.
세월은 그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겹겹이 쌓여 다정한 선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