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좋은 일 그만하자

전세의 함정

by 온행

결혼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파트 매매라는 것이 화제에 오르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공부해 보니 그 시기가 긴 하락장의 끝무렵이었더라. 하락기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집값은 '내려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고, 친정 엄마조차도 '전세로 옮겨 다니며 깨끗한 새 집에서 편하게 살아라'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내 집 없이 사는 것'보다 '빚지는 것'이 더 터부시 되었던 것 같다. 우리 부부도 그런 흔한 생각에 젖어 있었고,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하다 보니 언감생심이라는 생각도 은연중에 있었다.


그랬던 내가 생각을 바꿔먹은 계기가 있었으니, 첫째는 '전세'의 숨은 진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아담한 신축 투룸에 입주했던 우리, 2년 만에 대출 8천만원을 갚고 이제 조금만 더 갚고 저축이라는 것도 좀 해볼까 하던 때에, 집주인이 전세금을 수천만 원 올려 받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 비율로 따지면 무려 20%를 인상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전세가 귀한 시절이라, 비슷한 컨디션의 다른 집보다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때 깨달은 전세의 진실. 내가 2년 벌어 모은 돈으로 집주인 대출 대신 갚아주는 것이구나. (경우에 따라서는, 집주인 생활비나 용돈으로 보태주는 것)

당시 정책 상 건축주들은 초저금리로 대출을 땡겨 건물을 우선 짓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받아 대출을 갚는 식으로 자기 자본 없이 자산을 키울 수 있었다. 지금도 기본적인 방식은 같지만 그때는 저금리 시대였던 데다가 정책 상 초저금리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업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신축 빌라와 건물을 우후죽순 지었을 때였다. 당시 자취생들이 많았던 지역에서는 어딜 가도 수십 채의 빌라가 동시에 지어지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쳇바퀴를 돌며 살게 되는 걸까. 2년 벌어 전세금 올려주고, 또 2년 벌어 전세금 올려주고, 언제까지고 계속. '더 비싼 전세로 옮기는 것'이 최선인 삶이 되는 것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집을 살 수 있다는 생각도, 사야겠다는 의지도 없었기에, 끝없는 전세 무한 루프에 올라탈 수는 없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들었다. 당장 집을 살 수는 없었기에 아직은 깨달음을 얻은 단계에 불과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 끝없는 전세 무한 루프를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그로부터 한참 후에 아파트 매매 타이밍 문제로 잠깐 월세 살이를 한 적이 있다. 2년 미만으로 잠깐 지낼 곳을 찾고 있었기에 아파트부터 빌라까지 다양한 집을 보고 있었는데, 너무나 저렴한 가격에 컨디션도 좋은 쓰리룸 빌라에 방문했을 때 일이다.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 그 집에서 지내며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내내 밝은 표정으로 설명해 주던 내 또래의 여성에게 '어디로 이사 가시냐' 물었더니, 그녀는 경기도의 신축 아파트 월세로 옮길 예정이라 말했다. 남편이 신축에 살아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며.

좋은 인상을 풍기던 친절한 분이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잠시 들었다. 몸의 편안함을 찾아 점점 더 멀리, 경계를 지나 밀려나지 마세요. 무한 루프에서 빠져나와 보면 훨씬 많은 기회가 눈에 보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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