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터

남의 모든 말과 행동을 마이크에 대고 떠들어 대는 사람

by 온행

스포츠 캐스터들의 말재간을 듣고 있으면 참 재주가 대단하다 싶다. 잠시도 사운드가 비면 안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단 1초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말한다. 물론 대부분은 경기 관람과 상황 이해에 도움이 되는 말들이다. "18번 선수가 어디 출신인데, 그 지역의 이런 특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플레이를 합니다. 몇 년 전에는 이랬고 또 몇년 전에는 저랬는데, 지금은 이런 경지에까지 올랐습니다. 라이벌인 어느 나라 몇번 선수와는 이런 히스토리도 있고, 이런 저런 게 관전 포인트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와- 엄청난 조사를 했구나. 시의 적절하게 필요한 정보를 쏙 골라 순식간에 말하고 빠지는 것도 대단하네.' 싶다.

하지만, 또 가만히 들어보면 별 정보가 들어있지 않은 의미 없는 말을 되뇌이는 것 같기도 하다. "28번 선수가 손을 들었습니다. 경기장 밖의 하늘이 참 맑고 청명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내일은 경기가 없는 날입니다." 같은 것들이다.


작고 소심한 내가 발견하면 '히익-'하고 한발 비켜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두번째 유형의 캐스터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눈과 귀에 들어오는 모든 상황을 유심히 보고 뇌 속에서 처리된 정보를 모두 입 밖으로 내뱉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그 정보들이라는 게 고유의 인사이트와 지식을 거쳐 정리된, 유지 및 전파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살다보면, 그러면 안되지만 그러게 되고, 그러면 안되는 걸 알고 있기에 이성을 한껏 이용하여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상황이 온다. 내가 보기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너무나 촌스러운 취향을 풍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훌륭한 시민 1인인 동료가 자신만의 패션 센스와 취향에 대해 일장 연설을 내놓을 때, 그러면 안되는데 못된 생각을 하게 되고,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억지 미소를 지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위해, 인성 수양을 위해 노력하는 나를 지긋이 보며 "너 지금 속으로 비웃고 있지?"라며 쓸데 없는 자기 뇌 속의 정보를 마이크를 켜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가족이 모인 모임에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웃는 꼬마아이를 보고 "쟤 웃는 것 좀 봐. 꼭 누구 같다."라고 첨언한다. 모두가 그 아이가 웃는 것을 봤고, 아이라서 바보같이 행동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예의 없는 말을 한 아이를 훈육하는 상황에서도 "애들은 어른들 하는 말을 다 따라해. 이래서 어른들이 말을 조심해야 해."라며 아는체를 한다. 모든 부모가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보고 들어 배운다는 걸 안다.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보고 배운대로 버릇없는 말을 했다는 것도 안다. 알고 있으니 왜 그런지 묻지 않고 부모가 아이를 훈육하는 것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 함께 보고 있는 공통된 화면을 유난히 자세히 관찰하고, 모두가 보고 있으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일, 혹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흘려보내는 게 좋다고 판단한 일을 모두 '중계'한다. 마치 쓸모 없는 정보를 모두 주절대는 캐스터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고3 교실에 걸려있는 '지켜보고 있다' 는 급훈처럼 느껴진다. 그 글귀를 본다고 해서 내 공부 효율이 전혀 올라가지 않지만, 누군가가 나를 참견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 오히려 공부 정서를 해치는 존재다.


감정적으로 무던하고, 혹은 받아 치는 것을 잘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과정에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캐스터형 인간들을 응대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본 걸 다 입으로 뱉네. 혼잣말이 많은 사람이네.'라고 하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불편하다. 내 행동과 말을 야구경기장 카메라처럼 줌을 땡겼다 풀었다 하며 지켜보고 있다가 인식된 모든 걸 마이크에 대고 떠드는 것 같아 불편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고, 도움 받는 사람이 전혀 없는, 쓸모 없는 말을 해서 그냥 지나갔으면 하는 상황을 한번 더 부각시키는 게 불편하다. 그러면서 본인이 관찰력과 통찰력을 갖춘 사람인 양 자기 만족하는 듯한 그 뿌듯한 표정이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캐스터적 성향이 발견되면 마음 속으로 차단벽을 내린다. 그 쓸모 없는 중계에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동석해야 할 때 자리를 최대한 멀리 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과학적인 주장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험 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말의 사운드는 들릴 지언정, 메시지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중계를 계속할 때는 눈치를 준다. "저를 너무 그렇게 자세히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하는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럼에도 계속한다면 '정색'으로 분위기를 망치는 수 밖에.) 편한 사이라면 "그냥 넘어가."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알아."라고 살짝 무안을 준다.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지만 별 상관은 없다. 나는 이미 선을 그은 사람이니. 모임이나 집단 전체를 파탄낼 정도의 갈등만 아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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