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
나의 부모님은 기차도 닿지 않는 시골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학교 공부도 다 마치지 못하고 서울에 돈 벌러 올라온 전형적인 흙수저였다. 1980년대 서울에 노동자들이 밀려들어오던 시절.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가 자리를 채운, 한때 '00공단'으로 불리던 동네의 단칸방이 나의 첫 기억이다.
흙수저의 신세한탄 같은 것을 적으려는 것은 아니다.
죽어라 아끼고 모으신 부모님은 이른 나이에 노후준비를 마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시고, 나는 부모님께 용돈 받아가며 대출 한 푼 없이 대학 공부를 마쳤다. 부모의 재산까지 심사 받아야 하는 F1 비자로 미국 교환학생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 수저가 분에 넘치게 감사한 것도 아니다. 비교를 하자니 끝이 없어서 나도 못난 마음으로 잘 사는 집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마흔이 되어 돌아보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경제적 안정을 찾는 과정을 겪은 덕분에 나만이 배울 수 있는 교훈도 있었다.
내가 물려받은 가장 가치있는 정신적 유산은, DNA에 각인된 절약 정신과 삶의 고난을 돌파하는 정신이다.
24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두 딸을 키우며 절약 그 자체의 삶을 사셨다. 외식이나, 위 아래 세트로 된 옷은 남의 이야기였다. 욕실도 없는 화장실을 주인집과 함께 쓰던 시절이라, 화장실 문제에 예민했던 5살 배기 동생은 어린 나이에 변비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줌짜리 세간살이를 놓고 남은 자리가 우리 네 식구의 잠자리였다. 키가 큰 편이었던 아빠는 늘 다리를 채 못 편채 주무셨다. 그런 아빠가 술 한잔 거하게 하고 늘어져 주무시던 날에는, 유리가 끼워진 미닫이 문이 아빠 다리에 부딪혀 쿵쿵 소리가 났다.
엄마아빠 모두가 아빠의 자영업에 매달리셨고, 나도 7살 무렵부터 가게로 오는 전화를 받으며 손님들 전화번호를 받아 적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 안 계시니~?" 하면서 끊으려는 전화를 "제가 전화번호 적어놓을게요!"하며 붙잡아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부모님 때문이다.
그래도 그 절약 덕분에, 그리고 아빠의 사업 수완으로 우리는 점점 집을 넓혀갔고, 아파트에서도 살아보고, 건물 맨 윗층에서 '주인집' 소리도 들어보며 살았다.
맨 손으로 타지에 올라와 자기만의 성을 쌓아 올린 부모님을 보고 자란 나에게 그 삶을 향한 간절함이 스며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돈이 날 서럽게 할 때나, 돈 벌러 나가는 일이 지긋지긋할 때는 술 취한 아빠가 다리를 채 오므리지 못하고 편히 자던 날, 미닫이 문에 닿던 쿵쿵 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또다른 교훈은 역설적으로 정서적 유산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어린 나이에 가진 것 없이 가정을 꾸린 부모님이다보니, 우리 집의 당면과제는 의식주 해결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보내고, 안전을 지켜주는, 사회적인 부모 노릇이 최선이었다 생각한다.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성찰, 관용과 배려, 실수를 감싸주는 관대함, 타인에게 선의를 가지고 내 것을 나누는 것 등은 내가 가정에서 물려받은 것들은 아니었다. 8할은 책에서 읽고, 나머지는 TV에서 보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며 조금씩 쌓아간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그래서 내 인생에 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치들이다.
가난과 정서적 결핍은 나의 어린시절을 채운, 나의 정신의 뿌리이다. 그리고 그 결핍은 나에게 배우고 사색하고 성찰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게 했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는 조금 더 풍성한 정서적 유산을 물려주는 것을 또 하나의 삶의 목표로 하여 살고 있다. 나의 가정에는 물질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따뜻함까지 채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