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by 온호류



2024년 4월 7일 일요일

(전) 남편에게 전화해 사과한 날 (남이 되기까지 D-24)



오랜만에 놀러 온 친언니와 함께 근처 카페에 왔다. 날이 너무 좋아서 카페테라스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집에 엄마가 있기 때문에 나와야 하는 이유가 더 컸다. 요즘 겪고 있는 거울 치료에 대해 언니에게 할 말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이전 화에서 요즘 엄마와 부딪히면서 거울치료를 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직접 당해 봄으로써 (전)남편의 심정을 헤아리게 됐다고. 남편이 말할 때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고, 답답하고 억울하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엄마의 행동을 보며 이제 와서 이해되는 중이었다. 그런 연유로 언니와의 대화에서 엄마가 많이 등장할 예정이라 일찌감치 카페 핑계를 대고 둘이 나왔다. 집에서 얘기를 했다면 엄마는 안 듣는 척 부엌에서 귀 기울이고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하느라 집안일을 하나도 못 했을 거다.



IMG_4938.jpg 언니가 찍어준 경태와 나



작년까지만 해도 언니부부는 지금 내가 있는 방에서 지내며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다. 마침 남는 방이 2개 있으니 몇 년 정도 엄마집에서 지내며 돈을 더 모으기로 했던 거다. 당시에 언니도 엄마와 있던 트러블을 종종 내게 하소연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열받음과 고충을 언니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얘기가 계속될수록 "남편이 참 힘들었겠다.", "내가 너무 했던 거 같다." 이런 자책의 말들이 자주 튀어나왔다. 내가 힘든 만큼 남편의 마음이 더 각별히 이해됐던 거다.




이틀 전, 엄마와 또 한 번 크게 싸울 일이 있었다.

엄마대신 우유배달은 이미 약속된 거였고 엄마가 부탁한 일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도왔지만 쪽파사건은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수술한 엄마가 팔을 못쓰는 관계로 나는 엄마를 대신해 새벽 우유배달을 하고 있다. 학창 시절, 거듭되는 아빠의 사업실패로 바닥에 나앉을 뻔한 우리 집안을 우유배달로 바로 세운 엄마였다. 어릴 적엔 엄마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엄마의 성실함과 꾸준함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그런 엄마의 일을 도울 수 있어서 내가 백수인게 참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엄마를 돕는 건 아니었다. 이혼 후 홀로서기를 해야 하니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엄마는 내 시간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려 했고, 그런 부분이 날 화나게 했다. 마음대로 약속 시간을 바꾸고,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인데 상의 없이 일을 벌이는 그런 것들 말이다.



"엄마! 왜 그걸 내 상의도 없이 엄마 혼자 정해? 나 집에서 노는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무슨 쪽파도 니 허락받고 사야 해?"

"아니, 엄마 팔도 성치 않은데 이 많은 거 혼자 못할 거 아냐.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으면 내가 싫다 했겠냐고! 상의해서 일정 잡고 그때 샀으면 됐잖아. 물어보지도 않고 시간 괜찮겠지 하고 사는 게 싫다는 거야. 나도 내 살길 찾느라 바쁜데, 새벽 우유배달도 하고 병원도 데려다주고 다 군말 없이 하잖아. 그 외에는 내 시간 존중해 달라고!"

"됐어. 앞으로 너한테 일절 도와달라 그러나 봐. 혼자 할 테니까 신경 꺼. 못된 계집애. 내가 이거 하나 샀다고 너한테 욕을 먹어야 해?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기분이 상한 엄마는 나를 탓했다. 이런 별거 아닌 일에 짜증을 내는 내 탓.


엄마에겐 별거 아닌 일, 예를 들면 나한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쪽파를 왕창사서 다듬으라고 하는 것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엄마는 뭘 그런 거 가지고 뭐라 하냐며 성을 냈지만 바쁘다고, 노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늘 내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났다.


'기분 상하는 일'이란 뭘까? '기분 상하는 일' 혹은 '화나는 일'의 정의만큼 모호한 게 또 있을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기분 상하는 일이 다 다르다는 것을 나는 남편과 싸우면서 배웠다.


누구에겐 기분 상하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다. 기프티콘의 기한이 다 돼서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이 나에겐 별일 아니었지만 그에겐 큰 분노를 부르는 일이었고, 여행 일정이 틀어지는 것 같이 내겐 별 거 아닌 일에도 그는 기분이 상했다. 겨울의 정전기는 그에겐 하찮은 일이었지만 내겐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공포스러운 일이었고,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게 그에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내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보면 개인의 취향과도 같은 '기분 나쁨의 기준'을 마치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그를 나무랐다. 이 정도는 좀 넘어가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왜 이런 거에 기분이 나쁘냐면서. 엄마가 내게 그러했듯 나 또한 기분 나빠하는 남편을 탓하곤 했다. 나한텐 '기분 상할 일'이 아닌데, 나한텐 '별거 아닌 일'인데, 이런 것에 화내고 기분 나빠하는 그의 속 좁음을 탓하고 있던 거다.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나는지, 나는 왜 맨날 그에게 미안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 마음 여리고 화가 많은 남자를 고른 건 나인데 너는 왜 그러냐고 묻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상대에게 내가 할 말은 '이건 기분 나쁠 일이 아니야.'가 아니라 '기분 나쁘게 해서 미안해.'이다. 그 기분 나쁨의 기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어도 나로 인해 기분이 상한 것을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


부부나 연인사이에 네가 맞냐 내가 맞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그냥 상대방이 싫다 그러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고 앞으로 안 하면 그만이다.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보단 마음으로 그의 감정을 먼저 받아들였어야 했다.


모든 것을 내 기준으로 납득하고자 했던 것,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모두 내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언니랑 한바탕 이런 얘기를 하고 나니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나의 무지를,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싶었고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언니와 헤어지고 경태와 근처 호수공원을 산책하며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몇십 분을 망설였다. 누가 보면 짝사랑에게 전화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거다. 그러다 안 하고 후회할 바엔 하고 후회하자! 결심하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잘 있었어?"


대전에서 이혼서류를 접수할 때 보고 약 2주 만의 연락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남편의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이 냉랭하고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냥, 경태랑 산책하는데 생각나서 전화했어."

"......."


남편은 마치 "우리 이제 그럴 사이 아닌데 왜 전화했어?"라고 하는 듯 침묵으로 답했다.

계속되는 침묵에 남편은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용건이라도 전달하고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실,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뭘?"


나는 남편에게도 엄마로 인한 거울치료에 대해, 내가 겪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얘기했다. (이날 엄마 귀가 꽤나 가려웠을 거다.)


"내가 그랬었잖아. 네가 화낼 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은 화 안 낸다고. 그 화는 니 거니까 내 탓하지 말라고. 근데 내가 화나게 하는 것도 맞더라고. 나는 화가 없는 줄 알았는데, 엄마 태도에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뭐 그런 걸로 화를 내냐며 내 탓하는 데 진짜 기가 막히면서 너 생각 많이 났어. 미안하더라."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맙네."


이후에도 다른 얘기를 했지만 남편은 전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됐어. 이미 지난 얘긴데 더 얘기해서 뭐 해."

"괜찮아. 어차피 이제 과거 일이잖아."


남편은 이런 식으로 이미 지난 일이고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 같았다. 남편의 냉랭한 태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남편도 이제 정말 마음을 정리했구나!' 받아들여졌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도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나 보구나. 그래, 우린 이렇게 진짜 관계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통화는 허무하게 종료됐다.


전화를 끊고 갑자기 찾아온 무력한 기분에 바로 앞에 보이는 벤치에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쓸데없이 예쁜 호수공원에 비친 노을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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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경태가 차갑고 촉촉한 코로 내 손을 콕콕 찍으며 멍해져 있는 나의 감각을 깨웠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경태가 배고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애절한 눈으로 나만 보고 있는 경태를 들어 안아 꼭 껴안고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진짜 끝이다. 그래, 나도 미련 갖지 말고 경태와 둘이 잘 살아보자.'



60일의 이혼조정 기간 동안 사람의 마음이 사소한 것에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인 동물인지, 왜 사람의 마음이 갈대라고 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고도 우리는 몇 번이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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