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짧은 통화 이후 나는 빠르게 마음을 정리해 갔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차디찬 그의 태도에서 그는 이미 남이 될 준비를 마쳤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의무 조정 기간을 갖는 중이긴 했으나 여전히 복잡한 심정이었다. 머리로는 이혼이 서로를 위한 선택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 결정이 옳은 선택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는 상태였달까. 남편과의 추억을, 그에 대한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자꾸 삐져나오는 모든 감정을 이성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제 다 끝인데 무슨 소용이야.'라며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빨리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은 거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구질구질하게 자꾸 뒤돌아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현실적인 생각만 하며 지냈다.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대전 가는 날이 돌아왔다. 약속된 법원 조정 기일은 아직 남았지만 옮겨야 할 짐도 많고, 내 명의로 되어 있는 차를 그의 명의로 변경해야 해서 겸사겸사 내려가기로 했다.
전날 밤,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도착하면 버릴 거 미리 선별해서 폐기물 스티커 사다 놔. 내일 버릴 수 있는 거 다 버릴 거야."
"피아노만 처리할게. 다 못 가져가는 건 천천히 가져갈 거야."
"피아노 의자도 버려야 하는 거니까 그것도 스티커 사다 놔."
"무료 나눔 할 거야."
"(결혼사진)액자 같은 건 가져갈 거면 가져가고 안 가져가면 그것도 폐기물 스티커 붙여야 해."
"니가 버려 그런 건."
나는 결국 짜증을 냈다. 당근마켓에서 중고 거래로 만나는 사람도 이것보단 친절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냉랭하고 빡빡하게 굴었다. 겨우 하루 머무는 거라 안 그래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조금도 돕기 싫다는 듯 매정하게 구는 그가 미웠다. 며칠 전에도 일정을 조율해야 해서 연락을 했는데 나를 위해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며 비협조적으로 나왔었다. 근데 오늘도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걸 보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물었다.
"너 진짜 왜 이래? 왜 이렇게 띠꺼워?"
"뭔 소리, 필요한 용건만 간단히 해."
"내가 뭐 잘못했어? 나한테 안 좋은 감정 있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아무 감정 없어서 감정 없이 얘기하는 거야."
"감정 없지 않잖아. 매우 적대적이잖아."
"그건 너 생각이고 난 아무 생각 없어. 업무적으로만 하자. 이제 남인데."
그는 지난번 통화처럼 다 끝난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남보다도 못한 사람처럼 대했다. 아무 감정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감정 없는 사람에겐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감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적대적으로 구는 거였다. 뭔가 기분이 나쁘거나 단단히 오해했거나.
항상 행복하길 바라. 꿈 많은 친구야.
지난번 대전에서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손 편지를 남기고 왔는데, 편지를 확인하고 그가 보낸 이 카톡을 보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우리의 이혼은 그렇게 애틋하게 마무리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태도가 돌변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니까 이런 태도 말이야. 우리 아직 남도 아니고. 5년을 그렇게 지냈는데 무슨 가위로 자르듯 바로 남이 되냐고. 누구 한 명 죄를 지어서 소송하고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좋게 헤어지고, 서로 응원하고 잘되길 바랄 수도 있는데 왜 '이제 남이니까 널 하나도 도와주고 싶지 않아' 이런 태도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대뜸 음성파일 하나를 보냈다. 법원 가기 전날 밤, 오랜만에 본 나를 없는 사람 대하듯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꾸하는 그에게 실망해서 입장 정리를 하자며 내가 녹음한 파일이었다. 합의 이혼 동의 여부와 이 시간 이후로 서로 누굴 만나든 뭘 하든 법적으로 딴지 걸지 않기로 약속하는 내용이 담겼다.
남편은 음성파일의 내용을 떠올려 보라는 듯 나에게 물었다. 이게 남이지 뭐냐고. 나는 그가 그 뒤에 한 말을 보고 그제야 그가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이유를, 나를 남처럼 대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 건데 왜 그러지?"
순간 아차 싶었다. 맞다, 내 남편은 말과 행동은 거칠어도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슴도치처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우지만 그 안의 살결은 너무 보드라워서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이혼 선언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았을까. 나와 함께하던 이 집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야 새로운 환경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지만, 그는 곳곳에 나의 흔적이 있고 우리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경태도 없이 오로지 혼자. 얼마나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쓸쓸할까. 이제야 그의 심정이 헤아려졌다.
미운 건 미운 거고,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다. 내가 밉다고 그의 사랑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건 아닐 거다. 그는 나를 많이, 어쩌면 내가 그를 사랑한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했으니 그 큰 마음이 그리 쉽게 정리될 리가 없는 거였는데…. 5년을 함께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를 잘 모르고 이렇게나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혼을 결심하고 별거하는 동안 형부와의 대화나 엄마로 인한 거울 치료를 통해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고, 그도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그도 이혼 결정에 찬성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난번 대전에 갔을 때 "너 없으면 안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잘 지내서 나도 놀랐어."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마음이 너무 편해.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그를 보며 이혼이 최선은 아니지만 우린 함께보다 각자가 낫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줄 알았다.
근데 오늘 보니 아니다. 그는 이혼을 원치 않는데 휩쓸려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그의 특성상 다시 잘해보자 말하고 싶다가도 내가 단호하게 마음을 정리한 듯 보이니까 자기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보란 듯이 더 무심하게 대하는 듯했다. 지난번 통화에서 그렇게 차갑게 말한 것도 이 녹음 파일을 들으며 여러 번 상처받고 서운한 마음이 커져서 그런 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의중을 짐작해 보고 나니 마음이 한쪽이 아리면서 나는 또 흔들렸다.
'사실, 세상에 해결 못 할 문제는 없는데… 내가 해결하기를 포기하는 거고 그를 포기하는 것뿐인데….'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도 행복하게 공생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남겨질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면서 함께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머리를 굴려보려 하고 있었다.
순간,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 처지가 남편을 불쌍해할 처지가 아닌데 누가 누굴 안쓰러워하는 거야?'
지금의 나는 호기롭게 대학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에 집중해야 할 중요한 시기를 남편과의 전쟁과 이혼 고민으로 놓쳐버린 참이었다. 그만둘 당시에는 사업도 해보고 싶고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불안정한 결혼생활 속에서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남편이 만들어 준 그늘에서 여유 부리고 있던 것도 맞다. 현재 고정 수입도 없으니 당장 돈 벌 일을 찾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 건 나인데 누가 누굴 불쌍히 여기는지 스스로도 참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이런 오만함이 우리가 이혼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불쌍히 여긴다는 자체가 그를 아래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해온 행동들이 내겐 꽤나 폭력적이고 상식 밖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혹은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이유로 나는 조용히 그를 무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행동은 자주 감정적이었고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후회만 남았으니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에는 더 나은 결정을 위한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무시가 맞았다. 나는 그를 아들 키우듯 대했고 어떨 때는 같이 '살아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성실함 덕에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그만큼 잘났으면 모를까, 예전에나 박사 며느리였지 지금은 백수에 잘난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으니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을까? 가뜩이나 낮은 그의 자존감을 더 끌어내리고 그를 부정적으로 만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를 존경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한들 우린 이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배우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는 그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신뢰하지 못한다. 이미 너무 많이 실망했고 그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미움이 커져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돌봐야 하는 아들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으니 난 앞으로도 그를, 그의 선택을 믿지 못할 거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를 떠나야 한다.
아내로부터 받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은 없던 자존감도 샘솟게 하고, 아내의 단단한 믿음이야말로 진짜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싶게끔 만드는 건데 나는 관계가 어긋나고서야 이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남자는 아내가 믿어주는 만큼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되는 거였다.
내가 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한 걸까?
좋은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믿지 못한 걸까?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이 질문엔 영원히 답할 수 없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도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이젠 그만 흔들려야 할 때라는 것.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